어느 날 갑자기 6개월밖에 살수 없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여인과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의 달콤 쌉싸름한 로맨스를 그린 「여인의 향기」(SBS).
여주인공 이연재는 여행사 직원이다. 심성(心性)은 악하지 않은데, 똘똘하지 못하다. 세상 모든 실수는 왜 연재를 중심으로만 ‘헤쳐모여’를 반복하는 지, 안쓰럽기 그지없다. 어디 그 뿐인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죄송합니다”를 남발하고, 떠나지 않는 미소 속에는 한 자락 비굴함마저 깔려있는 느낌이다. 이런 여자와 함께 근무한다면, 조직의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하는 ‘나섬성’이 있어 좋겠지만, 그리 자랑하고 싶은 팀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왜 그럴까? 처음부터 그랬을까? 연재는 계약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이 되었다. 학력도, 집안도, 미모도 자신없는 그녀는 그래서 항상 주눅이 들어 산다.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것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 비루한 일상 덕분에 사랑은 사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수 타이틀까지 붙는다면, 결혼은 영원히 물 건너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야비한 부장의 인격모독과 성희롱을 ‘자신에 대한 관심’이라며 웃을 수 있는 ‘절대 참기의 달인’을 만든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소녀가장. 아빠는 고등학교때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직도 철이 없다. 그녀의 달인적 삶, 이해는 간다. 그녀도 보통의 여자들처럼 예쁜 옷 입고, 맛있는 것 먹고, 멋진 남자와 알콩달콩 사랑하며 살아가는 꿈을 꾸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왜 그녀에게만 현실은 엄혹한 얼굴을 내보이는 것일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결정은 본인이 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담낭암 말기란다. 분홍빛 미래를 위해 길거리표 티셔츠만 사 입고 일 년 사시사철 한두 켤레의 신발로 지내고, 점심은 구내식당이나 분식점에서, 명품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뿐이란다.
부장의 모욕적 행동에 최후의 반기를 들던 날, 자꾸 반항하면 여행업계에서 영원히 매장시켜버리겠다는 부장의 '껍데기 협박'에 연재는 "영원이라 해봐야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라며 부장 얼굴에 사직서를 냅다 던져버린다. (김선아의 연기는 이런 '반전적 분노'에서 빛난다)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의 행복을 한없이 유보했던 그 우매함에 연재는 과감히 이별을 선언한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고 멋진 자신에게 지상 최고의 선물을 안겨줄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짠순이 소리 들으며 모아온 돈을 모두 털어 맘껏 즐기자고 맘먹는다.
혹자는 그러겠지. ‘일단 살고 봐야지. 개천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는데, 미련을 떠는구만’ 이라고. 그러나 연재의 선택은 달랐다. 얼만큼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택한 것. 그래서 남루하기를 강요했던 일상을 향해 통쾌한 한 방을 날린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신의 꿈을 접어둔 채 일상의 쳇바퀴에서 쉬이 내려오지 못하는 이 땅의 직장인들이여,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세상을 향한 어설픈 용서나 관용보다 세상의 중심인 자기 자신을 향한 용기있는 결단이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것을 연재가 외치고 있다.
시즌2를 시작하면서
"나는 정말 드라마에서는 물론 인생도,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통속적으로, 이렇게 유치찬란하게.......게다가, 이렇게 신파적이기 까진 정말, 정말이지 싫었다......하늘아래 별다른 드라마도, 별다른 사랑도 없는 것일까? 드라마와 삶의 본질이란 게 정말 다 별 거 아닌데..." 「그들이 사는 세상」 송혜교 (주준영 역) 의 대사이다.
삶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가끔은 통속적이지 않고, 신파적이지 않고, 유치찬란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하는 얕은 기대를 하며 매일매일 드라마를 본다. 어느 날은 독고진의 사랑을 듬뿍 받는 구애정이 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세상을 쥐락펴락 하는 미실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무사 백동수가 되어 조선 최고의 협객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 속 인물은 가상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고, 잡히지 않는 꿈을 꾼다. 시즌2는 바로 그런 드라마 속 인물들을 쫒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공희정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테순이'라 불릴 만큼 텔레비전과 친하게 지냈다. 내 인생 최고의 TV 드라마는 (김수현 작)이고, 라디오 드라마는 김자옥의 이었다. 드라마 속에 세상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믿는 드라마 열혈 시청자. 지금은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