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6] 트윈 폴리오 해체… 가객 송창식의 탄생

조선일보
  • 윤형주
입력 2011.07.22 03:06

겨우 월세 얻은 송창식, 내 은퇴선언에…
학업에 전념해야 했던 나… 너무 미안해 사전 상의 못하고 콘서트장서 전격 은퇴 선언
연습없이 노래없다는 송창식, 신조 지키며 성공적 홀로서기… 우리 시대 명곡들 만들어

1969년 12월 23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트윈 폴리오 공연을 가졌다. 전 해 트윈 폴리오 결성 후 첫 리사이틀 때와 마찬가지로 전 석 매진됐다. 거기서 은퇴를 선언했다. 트윈 폴리오를 만든 지 2년 만이었다. 당시 집에서 압박이 커져만 가던 시기였다. 트윈 폴리오로 활동하면서 대학 출석 일수가 모자랐다. 다시 학업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트윈 폴리오를 해체해야 했다.

내 은퇴 선언은 송창식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에게 미리 말할 용기가 없었다.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재정적으로 좀 여유를 가지게 된 그였다. 그 기반이 무너지고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했으니, 섭섭하지 않을 리 없었다.

1986년 하와이 공연을 간 송창식이 호놀룰루의 한 공원을 걷고 있다. /윤형주 제공
1986년 하와이 공연을 간 송창식이 호놀룰루의 한 공원을 걷고 있다. /윤형주 제공
트윈 폴리오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자주 세시봉에서 같이 잤다. 나야 좋아서 잤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송창식은 가난했고 갈 곳이 없었으되 자존심은 셌다. 집에 데려갔을 때도 내 어머니의 관심을 불편해 했다. 그는 이틀 만에 우리 집을 나와 세시봉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가 마침내 방 한 칸을 얻은 것이 1968년이다. 당시 같이 어울렸던 사람 중 대일학원 강사였던 김영남씨가 술을 마시다 송창식에게 물었다. "원효호텔에서 잘래?" 옳다구나 송창식이 따라간 곳이 서울 원효로에 있던 김영남씨의 집 뒷방이다. 북향인 데다 방 밖을 벽이 가로막아 빛이 들지 않았다. 낮 한 시에도 어두컴컴했다. 새벽에 잠드는 송창식의 지금 수면 습관도 그때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

세시봉에서 나와 여러 술집을 돌며 공연할 때 우리는 하루에 1000원을 벌었다. 그는 500원으로 밥을 먹어야 했고, 목욕을 해야 했고, 내의와 양말을 사야 했고, 이발도 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빡빡했다. 당연히 집을 새로 얻을 여유도 없었다.

1969년부터 트윈 폴리오는 서울 명동 맥주집 오비스캐빈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각자 한 달 20만원을 받았다.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의 초봉이 14만원이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때 처음으로 송창식은 광화문 인근에 월세 집을 얻었다.

트윈 폴리오로 활동하는 2년간 지칠 때면 우리는 인천 무의도에 갔다. 무의도는 송창식의 안식처였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하면 송창식이 제일 먼저 데려갔던 곳이 이장(里長) 집이었다. 이장은 늘 사발에 소주를 담아 건넸다. 당시 한 주간지가 '술 잘 먹는 연예인 5인' 안에 나를 꼽았을 정도로 당시엔 술을 잘 마셨다. 그 술을 받아 마시곤 해변으로 나갔다.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밤을 지새웠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바다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은파(銀波)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송창식의 팬으로 보이는 한 애청자가 1970년대 초반 윤형주가 진행하던 동아방송 라디오‘0시의 다이얼’에 보낸 엽서. 당시 팬들은 송창식이 영화배우 찰스 브론슨을 닮았다며‘송스 브론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브론딘’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윤형주는 DJ 때 받
았던 엽서 수십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윤형주 제공
송창식의 팬으로 보이는 한 애청자가 1970년대 초반 윤형주가 진행하던 동아방송 라디오‘0시의 다이얼’에 보낸 엽서. 당시 팬들은 송창식이 영화배우 찰스 브론슨을 닮았다며‘송스 브론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브론딘’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윤형주는 DJ 때 받 았던 엽서 수십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윤형주 제공

트윈 폴리오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우리는 40년 넘게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래도 언제나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 그랬다. 송창식도 대단하지만 송창식과 40년 넘게 친구 하는 당신이 더 대단하다고. 사실 우리는 많이 달랐다. 예컨대 음악의 지향성이 달랐다. 송창식이 음악적으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화음을 쓰자고 권유하면,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범주를 떠나지 말자고 반대하는 편이었다.

듀엣 자체도 의외의 조합이었다. 1969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트윈 폴리오는 참 불가사의한 팀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목소리가 어떻게 이런 화음을 만들어내는가? 윤형주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때로 소년 같거나 여성적이다. 가정적인 느낌이 있다. 반면 송창식의 목소리에선 물과 바람, 파도 소리가 들린다. 때로 흙냄새가 나고, 때론 바위를 때리는 것 같다." 그 평론가를 직접 만났을 때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당신들의 목소리는 참 드물고 귀한 목소리들이오. 부디 잘 보존하고 간직하시오."

비록 트윈 폴리오는 해체했어도 송창식은 그 부탁에 충실했다. 늘 연습했다. 그의 신조는 "연습 없이 노래는 없다. 연습과 결과는 완전히 정비례한다" 였다.

트윈 폴리오를 해체하고 처음엔 서운했을 것이나 송창식은 솔로로 활동하며 자신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사랑에 관한 한 최고의 표현이 담긴 '우리는', 재일동포 2·3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싶어 만들었다는 '가나다라', 트윈 폴리오 해체 후 홀로서기를 시작하던 시절에 만든 '딩동댕 지난 여름' '꽃보다 귀한 여인' 등 그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노래를 만들고 불러 지금의 '가객(歌客)' '음유시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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