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내 어깨 두드리며 "동무가 필요하오, 함께 평양 갑시다"

조선일보
  • 채명신 예비역 육군 중장
  • 정리=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2011.07.19 03:17 | 수정 2011.07.19 13:27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上>
    제주 4·3사건 때 좌익과 대결, '섬멸'만큼 '감화'도 중요해
    날 암살하려던 부하들이 나중에는 "조심하라" 돌봐줘

    27일은 6·25 휴전 58주년 기념일이다.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남북은 155마일 휴전선을 두고 여전히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작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170발의 포탄을 쏟아부은 것도 현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젊은 세대의 안보에 대한 감각은 날로 둔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최정예부대라는 해병대에서 총기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안보가 해이해지면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한정권의 정체는 무엇인가?’본지는 평생을 공산주의와 싸운 채명신(蔡命新·85·사진) 예비역 육군 중장의 경험을 세 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채 장군은 중대장으로 전쟁을 시작해 연대장으로 휴전을 맞았다. 1965년에는 파월(派越)한국군총사령관으로 베트콩과 싸웠다.

    ☞ 채명신은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한 뒤 평양 부근에서 성장. 육사 5기로 임관돼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겸 맹호부대장 역임. 주브라질·주그리스·주스웨덴 대사 역임. 현재
    베트남 참전전우회 회장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1890년 말 조부(박진준)가 평안남도 진남포 부근에 세운 덕해교회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게 "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다. 권사였던 어머니도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사단은 며칠 전 생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산당원들은 "책임 동무가 누구냐"고 묻더니 다짜고짜 "교회 문을 닫으라"고 요구했다. 모태 신앙으로 목사가 꿈이었던 내 피가 순간 거꾸로 치솟았다.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김일성 장군의 정강정책에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걸로 아는데 당신들은 지금 장군님의 지침을 위반하는 것인가?" 공산당원들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렇게 반격하는 것이었다. "천당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본 사람이 있는가?"

    나도 즉각 대꾸했다. "당신들은 눈에 안 보인다고 공기를 부정하는가?" 궁지에 몰린 공산주의자들의 단골 수법이 있다. "동무! 왜 그리 말이 많소. 말 많으면 반동(反動)이오. 두고봅시다." 그걸 끝으로 그들은 씩씩대며 사라졌다.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던 시대였다. 다음날 가족들이 찾아가 울고불고해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게 그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와 친구들이 월남을 권유한 것이다.

    1947년 1월의 어느 새벽 나는 마침내 남으로 향했다. 문제는 어디로 갈 것이냐는 것이었다. 황해도 해주 쪽은 최단(最短) 거리였지만 경비가 심했다. 그 때문에 원산까지 가 철원·연천행(行) 기차를 탄 뒤 38선을 넘는 코스를 택했다. 전곡까지 가면 거리는 짧았지만 뭔가 불안해 연천 부근에서 내렸다. 그런데 점점 동행이 생겼다. 처음엔 혼자였는데 일행이 2~3명으로 불더니 나중엔 20명 가까웠다. 그런 '대(大)부대'가 이동하는데 연천 부근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채명신 20사단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을 위문차 방문한 장성들. 공교롭게도 이들은 196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의 주역으로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박정희 준장, 김용배 소장, 강문봉 준장, 송석하 준장이다.
    '안내자'를 자처한 그는 밀고자였다. 그가 이끈 곳은 연천보안서 안마당이었다. 몽둥이찜질이 시작되더니 보안원은 "스파이짓 하러 가는 것 아니냐. 네 신원을 조사해 열흘 안에 처분을 결정한다"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싶었다.

    나는 기독교도에 교사였다. 가장 죄질(罪質) 나쁘면 즉결, 두 번째면 시베리아 유형인데 그 중 하나일 게 뻔했다. 실제로 붙잡힌 지 9일째 되는 날 낯익은 보안서원에게 물었더니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동무는 시베리아로 정해졌소!"

    운명의 날을 하루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연천 주둔 소련군사령관이 죄수를 점검하러 왔다. 그가 내 앞을 지나는 순간 소련말로 외쳤다.

    "다와라시! 야 우치셀리(동지, 나는 선생이다)." 사령관이 신기하다는 듯 뒤돌아봤다. 나는 알고 있는 소련말을 총동원했다. "야 뚜다 게이죠. 젱기가 무노가 예스시. 젱기 다와이!(나 경성에 간다. 돈이 많다. 돈을 가져오려 한다)."

    서울 삼촌에게 돈 빌려 유학을 가려 한다는 뜻을 알아들은 소련군사령관은 손가락을 까딱대며 보안서장을 불러 석방을 명했다. 알고 보니 그는 소코핑 대좌였다. 풀려난 다음날 나는 38선을 넘어 미군 지프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선친의 독립운동 동지 이정규, 유림 선생이 계셨다. 그들의 도움으로 앞날을 모색한 끝에 1947년 4월 모집하는 육사 5기에 지원하기로 했다. 나는 3연대가 있는 부산에서 석 달간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육사에 입소했다.

    1948년 4월 6일 졸업과 함께 나를 포함한 9명의 동기가 9연대에 배속됐다. 4월 10일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 4·3사태가 터졌다. 4·3사건은 좌익들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곳을 습격해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내가 맡은 9연대 2중대 4소대원들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보는 소대원들의 눈길에서 강한 적개심을 눈치챘다.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부대는 6월 18일 밤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하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배후가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배후는 바로 내 직속상관 문상길 중위였다.

    9연대 1000여명의 지휘 라인은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김달삼·이덕구(남로당 제주도당서기)·오일균(일본육사 61기·9연대 대대장)·문상길이었다. 박 연대장 다음 목표는 나였다.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총탄이 날아든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놀란 나를 소대원들이 엄호하며 구출해준 것이다. 소대장으로 있으며 내가 북에서 공산당에게 당했던 일, 월남하면서 겪은 일을 얘기해준 게 일부 소대원을 감화시킨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이 일로 큰 교훈을 얻었다. '세퍼레이트 앤드 디스트로이(Separate & Destroy)', 내가 월남전에서 미군에게 격찬받은 '분리 후 섬멸' 전술은 이때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철저하게 적을 분리시킨 후 공격하는 것은 4·3사태와 태백산지구 빨치산소탕작전 때도 유효했다.

    이념이나 사상은 하잘것없는 장식품이다. 나는 소대장으로서 이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잤다. 그러자 처음엔 죽일 듯하던 대원들이 "소대장님 조심하십시오"라며 암살 경고까지 해준 것이다.

    만약 그때 김일성 따라갔다면 나의 총구는 남쪽을 겨냥했을지도…

    공산당의 허구를 처음 안 날은 1945년 10월 14일이었다. 그날 평양 기림리운동장에선 '김일성 장군 환영군중대회'가 열렸다. "위대한 조선 독립 투쟁의 영웅인 김일성 장군이 이 자리에 서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5만 인파가 환호했다.

    그런데 연단(演壇)에 선 이는 백발 성성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청년이었다. 운동장이 일순 침묵했다. 곳곳에서 탄식 소리도 들렸다. 돌아오는 길에 신문 호외(號外)가 나돌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가짜 김일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 내가 김일성 정권에 참여할 뻔한 일이 생겼다. 소련군은 '평양학원'이란 걸 만들었다. 청년 엘리트를 5~6개월 훈련시켜 군의 초급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사관학교 격이었다.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金策)이 그 중책을 맡았다.

    김책은 청년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평양에서 국민학교 교사 30명을 동원했다. 일종의 홍보요원으로 선생들을 이용한 것이다. 나는 독학으로 교사 자격증을 따 진남포 부근 덕해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선전요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김책과 처음 만난 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소련은 사회주의라는데 정말 인민들이 잘사나?" "계급 없는 평등사회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을 수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김책은 놀란 표정이 됐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회과학에 그렇게 통달한 것인가?" 나는 사회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다. 다만 독립운동, 더 정확히 말하면 무정부주의에 탐닉했던 아버지가 읽던 책을 곁눈질한 수준이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만든 따발총을 인민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김책은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1946년 2월 8일 열린 평양학원 개교식에 초대했다. 거기서 소개받은 김일성은 호남형으로 덧니가 많았다. 드라큘라 영화 주인공 같은 인상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수술을 했는지 덧니가 모두 없어졌다.

    김책은 나를 가리키며 "사회과학에 통달한 청년 동무"라고 소개했다. 김일성은 그 말에 대뜸 호의를 보이면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동무 같은 젊은 동무들이 필요하오. 평양으로 가 나와 함께 일합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처음 맛본 소련 사이다의 달콤함이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김일성은 "그럼 김책 동지를 잘 도와주고 어머니를 모실 방안이 생기면 그때 같이 일합시다"라고 했다. 만일 그때 김일성을 따라나섰다면 그로부터 몇년 뒤 나의 총구(銃口)는 남쪽을 겨냥했을지도 모른다.

    무수한 '내'가 증언하는 6·25전쟁 기억과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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