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4] 무협지 읽는 사나이

조선일보
  • 가수 윤형주
    입력 2011.07.18 03:07 | 수정 2011.08.05 18:04

    악보에 없는 후렴 부른 송창식 "내가 만들었어"
    세시봉 데뷔무대서 앙코르 나오자, 가곡 부른 뒤 즉석에서 “오 마리아”
    무협 열풍에 이장희 호 ‘색혈일검’… “강호에 나가보지 않겠소” 농담도, 이야기 있는 노랫말로 재능 꽃 피워

    작년 세시봉 열풍이 터지기 전까지 송창식과 함께 트윈 폴리오 특별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2009년 7월부터 경기 광주시에 있는 송창식의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해왔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한 번에 서너 시간씩. 그가 내건 조건이었다. 특별 공연을 제안했을 때부터 그는 완강했다. 연습 없이는 공연도 없다고 했다. 여러 음반 작업으로 호흡을 맞췄고, 김세환과 함께 '빅 3' 공연도 계속 해왔는데 왜 그런 조건을 다느냐고 물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40년 넘게 다른 일 안 하고 노래했는데, 너는 워낙 할 일이 많아 음악에 소홀했잖아."

    처음엔 서운했다. 그러나 연습하며 깨달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송창식은 매번 숙제를 내줬다. 코르위붕겐(Chorübungen: 음정 연습을 하기 위한 성악교본)도 그중 하나다. 그는 그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뿐인가. 송창식은 음악의 모든 분야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이자 동료였다. 기뻤다. 연습할수록 그와 나의 화음은 더욱 섬세해졌다. 40년 만에 음악 하는 즐거움을 새로 얻었다.

    1967년 세시봉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조영남, 이장희, 양희은, 김세환, 김민기, 한대수, 전유성, 서유석…. 1960년대 태동한 통기타 문화를 함께 나누었던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송창식과의 인연이 유별하다. 내 20대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송창식이 세시봉에서 어떻게 데뷔했는지는 유명하다. 그는 점퍼와 워커 차림에 낡은 통기타를 치며 오페라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러냈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만큼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다음에 뭘 불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 그는 앙코르 송으로 한 곡을 더 불렀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렇게 운을 뗐다.

    "십자군 전쟁 때 어느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트윈 폴리오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송창식(오른쪽)과 윤형주. 1968년 가을, 지금은 없어진 잡지 '아리랑'에 실렸던 화보 사진이다. /윤형주 제공
    주위가 숙연해졌다.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나 울며 당신 곁을 떠났으나 나는 참 행복스러운 병정이오'로 시작하는 '어머니(Cara Mamma)'란 가곡이었다. 노래를 끝낸 뒤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것은 아들을 기다리다 숨진 어머니가 아니라 그 옆을 지켰던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러곤 다시 기타를 치며 "오 마리아, 오 마리아, 오 마리아, 아멘"이란 구절을 불렀다.

    나중에야 알았다. 악보를 구해봤더니 그 후렴이 없었다. 송창식에게 물었더니 그는 "내가 덧붙인 거야"라고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에겐 노래를 회화나 이야기처럼 불러내는 능력이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언젠가 송창식의 중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낡은 등사판 잡지를 건넸다. 잡지 이름은 '파이오니어(PIONEER)'.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송창식이 동창들과 함께 만든 문예잡지였다. 거기서 송창식은 '농촌생활'이란 시나리오를 연재했다. 농촌에 사는 박 영감과 아들 영민, 막 제대한 철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이야기에 대한 그의 관심은 끝이 없었다. 술도 마시지 않는 송창식의 취미는 무협지 읽기였다. 스무 권을 쌓아놓고 앉은 자리에서 읽었다. 그의 영향으로 세시봉 친구들 사이에 잠깐 무협지 열풍이 불었고, 우리는 호(號)를 갖게 됐다. 송창식은 얼굴이 하얘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호를 얻었다. 이장희의 호는 '색혈일검(索血一劍: 피를 찾는 하나의 검)'이었다.

    당시 우리는 "강호에 나가보지 않으시겠소" "진지는 드셨소" 따위의 말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송창식의 재능은 나중에 발표한 '담배 가게 아가씨'나 '참새의 하루' '목동의 노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노래 가사에서 꽃을 피운다.

    1967년 혜성처럼 나타난 송창식은 그 뒤로 세시봉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세시봉 사장이 그에게 제안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 두 명을 모아 트리오를 결성해보라고. 대신 먹여주고 재워주겠다고 약속했다. 해서 그가 눈 여겨본 이가 나와 이익균이다. 그가 제안했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그는 팝송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씩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그를 놓치기엔 첫인상이 무척 강렬했다. 끝내 승낙했다. '트윈 폴리오'의 전신, '세시봉 트리오'의 시작이었다.

    1960~70년대 청년 문화의 산실이었던 통기타 라이브클럽 '세시봉' 주역들이 최근 20~30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3월 대구 북구 엑스코(EXCO)에서 열린 세시봉 콘서트에서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이 이야기와 노래를 곁들인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g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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