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한현우의 커튼 콜] 또 한명의 세시봉 가수 한대수

입력 2011.07.16 03:08 | 수정 2011.07.17 09:38

월街 증권회사서 연봉 10만弗 받던 아내… 17평 오피스텔에서도 희망 버리지 않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 음악이 최고…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내 노래에서 위안 받아…

"신국론ㆍ유토피아ㆍ성경ㆍ코란… 古典이 내 예술창작의 뿌리"

어둑한 거실 소파에 옥사나 알페로바(41)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 벽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그보다 22살 많은 한국인 남편이 그 옆에 의자를 놓고 기타를 쥐었다. "옥사나가 사진에 나와야 돼. 그게 리얼리티야. 이게 로큰롤이라고." 한대수(63)다.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사진작가, 시인, 그리고 '영원한 히피'로 불리는 한대수의 거처는 신촌의 56㎡(약 17평)짜리 오피스텔. 2004년 그가 뉴욕을 떠나 서울에 다시 정착했을 때만 해도 그 절반 크기였다. 한대수는 59세에 딸 양호(4)를 낳자 오피스텔을 한 칸 더 얻어 두 방을 텄다.

1948년 핵물리학자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러시아인 아내를 간호하며 늦둥이 딸을 키우고 있다. 송창식·윤형주·조영남과 함께 1968년 '세시봉'에서 데뷔했지만, 43년이 지난 지금 한대수는 돈도 인기도 별로 없는 데뷔 때 모습 그대로다. 인생 자체가 로큰롤(rock'n'roll)인 이 남자의 이야기를 이틀에 걸쳐 들었다. 14장의 음반과 6권의 책을 펴낸 그는 8월 23일 국립극장에서 대중음악인으로서는 처음 국립국악단과 협연하고, 10월엔 사진 에세이집 '나의 해골'을 펴낼 계획이다.

신학박사의 손자이며 핵물리학자의 아들인 그는 한국 포크음악을 개척한 뮤지션이 되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미국에 건너갔다가 뮤지션과 사진가, 시인의 길을 택한 그는 두 번 결혼했다. 러시아인인 두 번째 아내 옥사나는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리고, 환갑 다 되어 낳은 딸은 그가 키워야 한다. 폭풍 같은 인생을 살아온 한대수를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아내 옥사나는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자고 있다. 한대수는 "인생은 내 뜻대로 안돼. 바가지 긁는 마누라 같다고"라고 말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부인의 저런 모습을 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게 내가 사는 모습이잖아요. 저게 잠자는 게 아니야. 블랙아웃(blackout)된 거야. 기절한 거라고." 이때 옥사나가 부스스 깨어났다. 그녀는 남편 앞에서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는 남자들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 두 눈의 초점이 완전히 풀려, 어디를 바라보는 건지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남편이 "사진 찍어도 될까?" 하고 영어로 묻자 그녀는 "오케이, 잇츠 오케이"라고 말하고 탁자 위의 담배를 빼물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는데 낫지 않았나요.

"두 번에 걸쳐 6개월간 치료받았죠. 그래서 간이며 쓸개, 심장이 깨끗해졌어요. 그러니까 이제 또 술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거지." 한대수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6개월간의 치료가 헛수고가 된 상황에서 그의 웃음은 기이하게 들렸다.

―이 상황이 로큰롤이란 건 무슨 뜻입니까.

"인생이 그렇잖아. 옥사나 스물두 살에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육체미에 반했어요. 아주 예쁘고 늘씬했다고. 완전히 제시카 고메즈였다니까. 게다가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에서 관리부장까지 했어요. 연봉을 10만 달러나 받았다고. 그런데 이렇게 됐잖아. 한 여자(옥사나)는 완전히 환자지, 또 다른 여자(양호)는 꼭 보살펴줘야 하는 네 살짜리지, 나는 두 여자의 늪에 빠졌어요. 헤어나올 수가 없다고. 이게 로큰롤이지 뭐야."

한대수는 1974년 동갑내기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해 뉴욕으로 건너갔으나 89년 이혼했다. 이후 뉴욕에서 만난 옥사나와 92년 재혼했다. 모스크바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한 옥사나는 크렘린에서 간호사로 일했었다.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간 뒤에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혀 가정부 일을 하며 살던 중 한대수를 만났다. 이후 월스트리트에 비서로 취직, 매년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다가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한대수를 따라 한국에 정착했다. 그의 전처 김명신 역시 펑크(punk) 문화를 사랑한 독특한 예술가로, 한대수와 이혼 후 독일인과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했다. 한대수는 "9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로 이사한 뒤로는 소식을 모른다"고 말했다.

―양호는 누가 봐줍니까.

"아침 7시30분에 내가 어린이집에 데려다 줘요. 그리고 나는 방송국에 출근하지(그는 3년째 CBS FM의 '손숙·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오후 6시쯤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죠."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은 주부들이 많이 들을 텐데, DJ의 가정이 불우한 셈이군요.

"간단히 말해서 DJ 자격이 없죠. 그렇지만 언젠가 옥사나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사랑으로 받아주고, 희망을 가지고 노력 중이에요. 내가 그런 노력을 하는 걸 청취자들이 이해해주고 있어요."

―최근 '세시봉 멤버'가 모두 벼락인기를 얻었는데 혼자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MBC에서 나한테도 출연요청이 왔어요. 무조건 나오라고 난리가 났어. 그렇지만 내가 안 나갔지. 예나 지금이나 음악적 방향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같이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전혀 음악이 달라요. 성격도 다르고."

―'세시봉' 무대는 어떻게 서게 됐습니까.

"당시 유명한 프로듀서였던 이백천씨 소개로 서게 됐어요. 그런데 송창식·윤형주는 하모니 위주의 팝송을 불렀고 조영남씨는 톰 존스 노래를 성악으로 부르고 있더라고. 나는 세시봉에 선 첫날 내가 작곡한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어요. 미국에서 온 나는 한국 노래를 했는데 정작 한국 사람들은 팝송을 부르고… 완전히 거꾸로 된 거예요.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놀다가 왔으니 완벽하게 외계인 취급을 받았어요. 동물원의 고릴라였지. 그때부터 '한국의 밥 딜런'이란 말도 들었어요."

―그 별명을 싫어하시죠.

"맞아요. 자신이 유대인인 걸 감추려고 이름을 바꾸고(밥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이다) 공연을 너무 성의없이 해요. 무슨 보통사람들의 구세주인 양하지만 바하마에 섬을 두세 개 갖고 있어요. 부자인 것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진실하지 않아요. 음악에 절박함이 없다는 얘기죠. 음악은 절박함 속에서, 뱀이 껍질을 벗듯이 해야 하는 거예요."

―본인의 음악을 평가한다면.

"내 음악을 내가 평가하라? 나는 내 음악이 제일 좋아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라고 생각해. 하하하. 남이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어. 고통받는 인생들에게 도움이 된다고요. 나는 내 음악으로부터 인생의 도움을 받아요."

한대수의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 리사이틀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게 각인된 공연이다. 이날 공연은 조명을 모두 끈 암흑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어디선가 향이 피어오르고 한대수가 커다란 톱을 연주하며 등장했다. 이날 한대수가 들려준 노래 중 상당수는 그가 18세 때 작곡한 것들이었다. 팝송 번안곡이 대중음악의 거의 전부였던 때, 한대수의 무대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이 공연은 69년을 '한국 포크의 원년'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시봉에서 데뷔했지만 '세시봉 세대'로 분류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히피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였던 그는 너무나 앞서간 나머지 소외되었다. 데뷔 앨범(1974년) 재킷에 얼굴을 원숭이처럼 일그러뜨리고 일부러 초점을 흐려 찍은 사진을 쓴 것만 봐도 그는 대중친화적이지 않았다. 그의 관객은 서울에 있었지만 그의 세계는 여전히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반 녹음할 때 노래를 단 한 번 불러서 끝내죠.

뉴욕 사진학교에 다닐 당시의 한대수. 그의 나이 19세였다. / 한대수 제공

"나는 항상 원 테이크(한번에 녹음을 마치는 것)예요. 내 노래는 모두 내가 작곡한 거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여러 번씩 부르면 점점 더 나빠져요. 이게 연애하고 똑같아요. 처음의 열정과 사랑으로 한 번에 끝내야 돼요. 그리고 약간의 실수가 있더라도 음악에서는 그게 매력이고 재미예요." 그는 자서전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에서 이렇게 썼다. "음악은 진실로 마약이며, 한번 중독되면 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음악인의 생애는 화려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가족사(家族史)에 비하면 별로 독특할 것도 없다. 그의 부친 한창석(2009년 작고)씨는 서울 공대 재학 도중 미국 코넬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7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방으로 찾았으나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10년 뒤 한대수가 17세 되던 해, FBI가 찾아낸 한창석씨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하워드 한'이름으로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핵물리학자였던 그는 인쇄회사 사장이 돼있었다. 한대수의 가족이 찾아갔을 때 부친 한씨는 가족을 알아보긴 했으나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지난 10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 美 유학중 실종…
10년후 찾고 보니… 한국말 다 잊어버려…

―실종됐던 세월에 대해 한마디도 들은 게 없습니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 소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영어로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미래를 생각합시다'라고 말했죠. 한번은 아버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내가 물었죠. '아들로서 알 권리가 있다'고 말이죠. 그때 아버지는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고 말했어요."

―뭔가 추측하고 있는 건 있겠죠.

"아버지가 코넬대에서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였고 에드워드 텔러 박사(수소폭탄의 아버지)가 선발한 학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추측이야 해볼 수 있죠. 핵무기 개발에 중요한 인력으로 일한 뒤 그 기술을 한국에 가져갈까 봐 브레인워싱(brainwashing· 특정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을 당해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됐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대학 다니다가 유학 간 사람이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다고. 그런데 난데없이 백인 여자와 결혼해서 나타나다니, 뭐 다 추측일 수밖에 없지만…."

그의 조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를 설립한 사람으로, 이 대학의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냈다. 한대수가 생후 100일 됐을 때쯤 부친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또 실종됐기 때문에 그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이 밖에도 한대수의 가계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뛰어난 업적을 쌓은 사람이 무척 많다. 그의 조부의 형제만 따져도 부산 최초의 양의(洋醫)이자 독립운동가 한흥교 선생, 부산 최초의 고아원인 '애린원' 원장으로 '고아의 아버지'란 칭송을 들은 한정교 선생이 있다. 한흥교 선생의 아들 한형석은 '독립군가'를 작곡한 항일예술가이며, 연세대 조한혜정(63) 교수 역시 한대수의 외육촌간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집안이군요.

"하하하. 그리고 여기 포크 가수 한대수가 있지요. 이건 뭐 소설보다 더하지. 하여튼 그래서 어렸을 때 이미 미국을 들락거리고 뉴욕에 히피문화가 상륙했을 때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죠."

―'한국의 히피'라는 호칭은 별로 안 좋아하시던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캐터고라이즈(categorize·범주화)하길 좋아해요. 이 사람은 좌파다, 우파다. 그게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야. 우익적인 정신을 갖고도 어떤 행동은 좌파적으로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좌파이면서도 또 어떤 때는 부르주아야. 어떻게 좌파다 우파다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을 평가하려는 거예요? 당신 같은 신문기자 책임도 있어요. 뭐가 우파고 좌파고 개똥이야. 이름만 알면 되지. 자꾸 그렇게 박스에 넣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히피가 자유롭고 세계 평화를 사랑하고 비즈니스 마인드보다 예술창작 마인드를 더 높게 쳐주고 그런 건데, 순전히 성적으로 문란하고 마약하고 뭐 이런 것만 히피라고 생각하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기독교방송에서 열심히 DJ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돈 벌어서 양호를 열심히 키우고 있고 옥사나가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렸는데 이혼도 안 하고 내 책임이라 생각하고 간호하는 것, 이것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죠."

―말 그대로 '하이엔드(hi-end) 클래스'의 자손인 셈인데 어떡하다가 로커가 됐습니까.

"야,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네. 백만불짜리 질문이네. 나도 모르겠어요. 내 꼬라지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하하하하!" 그가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없었잖아요. 아버지는 유학갔다가 실종됐지.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재혼했지.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세상 사는 법을 나 스스로 터득해야 했단 말이죠. 그러다가 사진에 매력을 느끼고 음악에 빠지게 된 거예요. 내 인생을 구축하는 데 거의 간섭을 받지 않았죠."

그는 1968년 한국에 들어와 싱어송라이터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재혼한 어머니 집에 얹혀살다가 불붙은 연탄 한 장과 기타 한대 덜렁 메고 나온 한대수는 돈을 벌기 위해 디자이너와 영자신문 기자로 일했다. 75년 두 번째 음반 '고무신'이 나오자 당국은 이 음반을 통째로 압수했다. '체제전복적 음악'이란 이유였다. 중앙정보부는 이어 '물 좀 주소'가 실린 1집 음반도 시비를 걸었다. '물 좀 주소'가 물고문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한대수는 77년 다시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한대수가 한국에 머물던 10년 사이 뉴욕은 완전히 달라졌다. 히피들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여피(yuppie)'들이 활보했다. 청년들은 모두 넥타이를 매고 증권회사로 출근했다.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의 청년문화는 돈 싫고 명예도 싫고 우리가 알아서 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말쑥한 정장 차림의 청년들이 재등장했더라고. 그게 바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예요."

한대수는 그러나 여피로 변신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소박하게 살겠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렀다. 히피들이 주도했던 '플라워 파워(Flower Power)'는 70년대 들어 시들해졌지만 한대수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삶의 방식이다. 그는 상표가 밖으로 드러난 옷은 절대 입지 않고, 불필요하게 많은 돈을 벌지 않는다. 그는 시 '자연주의'에서 "하나, 자연에 복종할 것/ 둘, 테크놀로지를 최소화할 것/ 셋, 자기 교육을 최대화할 것/ 넷, 결혼하지 말 것·이혼하지 말 것/ 다섯, 별을 바라볼 것/ 여섯, 집에서 죽을 것"이라고 썼다.

1968년 불쑥 한국에 나타나 "물 좀 주소 목 마르요"하고 노래했던 한대수는 여전히 기타 치고 노래 부른다. 걸걸한 허스키 보이스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내 노래에 영어로 된 노래가 많은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며 "시간이 더 흐르면 대중이 이해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미국 국제시인협회 상임위원이기도 한 한대수의 문학과 철학, 예술은 책과 음악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책이 가득 찬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놀았으며 바흐와 모차르트를 들으며 자랐다"며 "문학과 시를 좋아해 미국 학교에서도 모든 성적이 엉망이었지만 영어만큼은 늘 A+를 받았다"고 말했다. "부산에 있는 목장을 운영하라"는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뉴햄프셔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그는 중도 포기했고, 이후 사진에 매료돼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연세대 설립했던 조부…  책 가득한 서재에서… 바흐ㆍ모차르트 듣고 자라…
음악은 마약과 같은 것… 중독되면 돌이킬수 없어

―예술창작의 뿌리가 독서에 있다고 해왔죠.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내 창작에 끝없는 자양분이 됐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그리고 성경과 코란을 읽었어요. 이 책들은 항상 베스트셀러이며 선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들입니다."

―"책 쓰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책을 여러 권 썼는데.

"이번에 나올 책은 내 머릿속의 세계관념, 남녀관계와 물질문화, 신(神)과 나의 대화, 컨슈머리즘을 다룰 거예요. 아주 양호할 것 같애."

―아이 이름을 '양호'라고 할 만큼 그 말을 좋아하는데, 어디에서 비롯된 말인가요.

"어릴 때 제일 좋은 데가 양호실이에요. 공부하기 싫으면 배 아픈 척하고 양호실 갔잖아요. 하하." 그러나 그는 자서전에서 1997년 일본 후쿠오카 공연을 앞두고 캐나다에서 연습할 때 즐겨 찾았던 토플리스 바(topless bar)를 '양호한 곳'이라고 부르며 입에 붙은 말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2002년 잠언집 '침묵'에 짧은 글들과 사진을 실어 펴냈다. 이 책의 수많은 구절 중 'To know that you don't know takes a lifetime to know(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평생이 걸린다)'와 'We are all sentenced to life(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강렬하게 와 닿았다.

―'침묵'을 읽으면 일종의 허무주의가 느껴집니다.

"우리는 서로 1등이 되려고 하고 더 넓은 집에 살고 싶어 하고 BMW를 사려고 하고, 하여튼 남들보다 잘나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지요. 그런데 생각대로 잘 안 돼. 인생이 꼭 바가지 긁는 마누라 같다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뭔가 이룰 만하면 죽을 때가 된다고. 하하하! 이게 무슨 역설이야! 인생이 그런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들어 '하이파이브' 자세를 취했다. 두 사내의 손이 철썩하고 서로를 후려쳤다.

―한대수에게 뉴욕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뉴욕에 총 37년 살았으니까 내가 뉴욕 귀신이죠. 뉴욕은 나에게 영양소와 비타민을 제공하고 생각을 바꿔놓은 도시예요. 정말 나쁘지만 도무지 떠날 수 없는 마약 같은 도시죠. 그런데 뉴욕도 많이 허약해졌어요. 특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른 뒤에 더 그래요. 런던과 파리에 이어 세계의 수도 자리를 50~60년 정도 지켰는데, 이제 그 바통을 넘겨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내 생각에 다음 세계의 수도는 상하이가 될 거예요. 두고 보세요."

―훗날 묘비명에 뭐라고 쓰이길 바랍니까.

"좀 멋진 말이었으면 좋겠는데….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어떨까. 푸하하하!"

가수 한대수씨가 부인 옥산나와 만나던 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알콜중독 치료중이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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