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 발목 잡은 대보단(大報壇)을 아시나요

조선일보
  • 전병근 기자
    입력 2011.07.13 03:22 | 수정 2011.07.13 06:18

    "임진왜란때 도와준 明에 감사" 1705년 숙종부터 머리 조아려
    개혁 군주 정조도 매년 찾아… 대한제국 세우며 환구단으로

    1894년 5월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일본의 침탈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으로 나라의 지경은 더없이 위태로웠다. 그 무렵 어느 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 후원으로 향했다. 아홉 계단 위 제단에는 중국 황제의 신위(神位)가 적힌 황색 지방(紙榜)이 있었다. 대보단(大報壇). 명나라 황제의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제단이다. 쇠락하던 조선의 국왕은 왜 사라진 제국의 혼령에게 머리를 조아렸을까? 이 대보단의 숨은 뜻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풀어낸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계승범 서강대 대우교수는 신간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에서, 조선 후기 200년간 이어진 대보단 제례는 당대 엘리트층의 뿌리 깊은 존명의리(尊明義理) 사상을 담고 있었으며,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 '의식의 족쇄'였다고 주장했다.

    통치이념의 위기 타개책

    대보단은 1705년 숙종 때 처음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구해준 명(明)나라 만력제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였다. 첫 제례에서 숙종은 직접 술을 올리고 음복했다. 당시 조선은 삼전도 항복(1637·청 태종에 패한 후의 굴욕적인 항복)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이 '아버지의 나라'였다. 유교 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 질서마저 흔들릴 참이었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존명의리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이 필요했다. 숙종은 대보단 제례를 주창하면서 '명과의 특별한 군부·신자 관계와 임란 때 나라를 살려준 재조(再造)의 은혜'를 강조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일종의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대보단.

    대보단은 후대로 가면서 더 강화됐다. 영조는 홍무제와 숭정제를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명을 세운 홍무제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대조(大造)의 은혜를 베푼 왕으로, 숭정제는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준 왕으로 추대됐다. 이 세 황제의 기일마다 제례를 행하도록 규정까지 내렸다. 명이 망하면서 끊어진 삼황(三皇)에 대한 제사가 조선에서 이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됐다.

    정조도 "황제 은혜 못 잊어"

    '계몽군주' 정조도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던 해 제례 후 정조는 이렇게 전교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이 다시 지음을 받은 날이다. 아! (명나라) 황제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정조의 친행(제례에 직접 행차) 비율은 24년 재위기간 중 23년(96%)으로 역대 최고였다. 정조는 서울의 유생과 무인에게도 제례 참석을 의무화해 불참자는 한시적으로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벌을 주었다.

    나라가 기울던 고종에 와서도 제례는 계속됐다.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가 이어지던 1882~86년 고종의 대보단 친행은 더 잦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기 한 달여 전까지도 홍무제 기일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 제례는 갑오개혁(1894~1895)에 와서야 중단됐다.

    중화의식 집착…세계질서 못 봐

    존명의리의 자취는 조선의 '자주독립' 후에도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환구단(�^丘壇·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을 세우고 천제(天祭)를 지낼 때, 그 근거는 "중화문명의 정통이 명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 계승범 교수는 대보단의 질긴 생명력을 조선 사회가 딛고 있던 이데올로기 체계에서 찾는다. 통상 국가의 권위가 무력과 이념에서 나온다고 가정할 때, 조선은 특히 문(文·이념)을 앞세우며 명에 대한 사대를 국시(國是)로 천명했다. 역대 왕들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은 제후임을 강조했다. 강력한 친위대를 갖지 못한 국왕으로서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존명의리의 가치를 솔선수범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대보단이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질서가 기울던 19세기에도 조선 주류 지배층은 독자적 권위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중화를 더욱 내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럼으로써 '오랑캐에 더럽혀진 전도된' 국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한 채 국난을 극복하고 통치 질서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저자는 "대보단은 단기적으로 왕조 통치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변국들의 국력·정세 변화를 조선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썼다. 명나라의 정신적 유산에 사로잡혀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조선의 운명에는 '대보단'이란 또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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