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아름다운 이별' 준비하는 중증근무력증 변혜정씨

  • 취재=장혜정 여성조선 기자
  • 사진=이준경, sbs캡쳐
    입력 2011.07.08 14:42 | 수정 2011.07.09 22:45

    흰 종이에 두 아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엄마는 슬그머니 웃는다. 이제 막 여드름이 돋기 시작한 14살짜리 첫째와 아직도 등을 긁어줘야 잠이 든다는 12살짜리 둘째. 두 녀석은 언제나 엄마를 웃게 한다. 잔잔한 시간도 잠시, 극심한 기침과 허리통증에 다시 간호사를 부른다. 억지로 찾아낸 혈관 속으로 한 방울 두 방울 들어가는 모르핀. 그리고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눈물.

    변혜정(41) 씨가 sbs 스타킹에 출연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래를 부른 건 두 아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병마와 싸워온 지난 8년을 돌이켜 보면 웃을 일도, 추억할 만한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용기를 냈다. 무리한 노래 연습에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포기 할 수 없었다. 녹화 당일 세트장 주변에 의료진과 각종 응급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폐가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노래 중간 중간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침을 애써 삼켜야 했지만 끝내 그녀의 애창곡 ‘깊은 밤을 날아서’를 다 불렀다. 그리고 두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출연진들도, 시청자도 울었다.


    ◆엄마가 없을 때 이 책을 읽어보렴
    분당의 한 대학병원에서 만난 변혜정 씨는 침대에 누워 영양제를 맞고 있었다. 중증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근육이 약해진데다 뇌하수체선종과 천식까지 겹쳐 제대로 약을 쓸 수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 세월이 벌써 8년째…. 착잡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선 기자를 그녀는 참 반갑게 맞아줬다. “기침이 심해서 제대로 말을 못할까봐 미리 모르핀까지 맞아놨어요.(웃음) 아침은 드셨어요? 제가 아침에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봤는데 이따 꼭 드셔보세요.”

    구토증세 때문에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는 그녀는 아침마다 두 아들의 밥상을 차려낸다. 엄마의 음식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저희 집이 병원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를 매일 3,4번씩 다녀요. 그럴거면 아예 입원을 하지 왜 번거롭게 통원을 하느냐고들 하는데 제가 병원에 누워있으면 우리 애들은 누가 챙겨요. 다만 한 시간이라도 애들하고 함께 있고 싶어요, 저한텐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녀는 유독 모성애가 깊은 어머니였다. 사경을 헤매던 순간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단다. 항상 ‘만일’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는 훗날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책 한권을 썼다. “엄마가 절실한 순간들이 있겠죠. 친구랑 싸워서 속상했을 때, 여드름이 났는데 어떻게 세수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술 진탕 먹었는데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그때마다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위로해주려고 썼어요.” 그녀는 다음 달 책이 출간되면 전국에 있는 고아원마다 선물로 보내겠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시련
    스쿼시와 수영을 즐기던 그녀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8년 전 기업체를 돌며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하던 때였다. 이유도 없이 쓰러져 팔, 다리에 깁스를 하는 일이 생겼지만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때 하루에 한 두 시간 정도 잤어요. 강의 준비다 뭐다 참 바빴거든요. 그렇게 병을 키우다 1년 만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천식외에는 정확한 병명을 모르겠다는 거에요. 답답하게 속만 끓이다 큰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거의 혼수상태로 실려 간 병원에서 제가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점차 힘겨워졌노라고 고백했다. 몸은 서서히 근력을 잃어갔고 달리기는커녕 서있기도 힘들었다.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게 되자 ‘차라리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됐으면 그냥 체념하고 살았을 걸’하는 모진 생각까지 들었다.

    몸이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병원비와 재활치료비 등은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집을 줄여갔고,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아야했다. “제가 위독할 때마다 부랴부랴 뛰어오는 부모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돌봐드리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부모니까 이해하겠지, 나중에 호강시켜드려야지 그런 이기적인 생각만 했어요.” 부모님 얘기에 왈칵 눈물부터 쏟았던 그녀는 자신이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녀는 어머님의 사업실패로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으나 마음을 다잡아 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카피라이터를 거쳐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그 바닥에서는 ‘꽤’ 잘나가는 작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호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혼자 소주 4병을 마시던 괄괄한 그녀를 9살 연상의 남편은 사랑했다. “솔직히 제 이상형은 아니었어요.(웃음) 그런데 사람이 참 자상하더라고요. 우리 집엔 딸만 넷이라 아들 노릇 해 줄 남자가 필요했는데 우리 애 아빠가 그래줄 것 같았어요.” 전공을 살려 고등학교 사회교사로 취직한 그녀는 시부모님까지 모셔가며 알뜰살뜰 가정을 꾸렸다.

    ‘스타킹’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촬영하는 내내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아이들한테 정말 좋은 선물이었어요. 거기서 만난 조혜련 씨나 정시아 씨와는 언니 동생처럼 지내요. 조혜련 씨는 일주일 뒤 찾아와 격려도 해주고, 병원비를 보태주시기도 했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은지원의 열혈 팬이기도 한 그녀는 녹화 당일 직접 은지원에게 노래를 선물받기도 했는데 나중에 은지원이 익명으로 그녀에게 후원금을 납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됐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서로 표현하세요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얘기하던 그녀가 갑자기 격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기자일행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젓던 그녀는 ‘생각처럼 그리 슬프거나 두렵지 않다’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어요. 어떤 일이든 나한테 닥칠 수 있어요. 심지어는 죽음까지요. 제게 문병 왔던 친구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먼저 떠나는 걸 보면서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어요.”

    “요즘 내 중요한 일과중 하나는 지인들에게 전화걸기에요. 짬 날 때마다 목록에 적힌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죠. 마음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해요. 통화가 끝나면 그 사람 이름에 줄을 긋는 거에요. 그렇게 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해요. 생각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요. 주위 사람들에게 늘 표현하세요. 못 다한 말이 사무치게 다가오지 않도록. 또 하나, 작은 부탁은 들어주세요. 병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많이 겪는데 사고로 아이를 잃은 아주머니가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운동화를 못 사준게 그렇게 한이 된다며 우시더라고요. 내가 해주고 싶은 것, 내가 나누고 싶은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죠. 살아 숨 쉬는 매 순간에 늘 사랑하고 또 감사하세요. 세월이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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