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38] 에스페란토 보급 앞장선 시인 김억… 항일운동 색채까지

입력 2011.06.27 03:08

오늘날 '에스페란토(esperanto)'라면 나라 간 언어 장벽을 극복해 보려는 국제어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1920년대 이 땅에서 '에스페란토'를 가르치려는 움직임은 '외국어 보급'을 넘어서는 하나의 문화운동이었으며, 항일운동의 색채까지 있었다. 일제가 한·일 민족 간 소통을 구실로 우리말을 짓밟으며 일본어를 쓰도록 만들려던 시절에 '중립적 세계어'인 에스페란토를 배우자고 외치는 것 자체가 반일 행위였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조선에스페란토협회'가 1925년 임원을 선임하면서 "사랑과 이해로 형제 가튼 생활을 하려고 함은 인류의 오래된 이상"이라며 "이 큰 이상을 실현하려면 에스페란토를 제외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창하게 천명한 것도 에스페란토에 실용의 수단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조선일보 1925년 11월 2일자) 당시 발표된 에스페란토 협회 위원 명단엔 홍명희(洪命憙) 김억(金億) 박헌영(朴憲永) 변영로(卞榮魯) 등 거물들이 수두룩하다.

'에스페란토' 창안자인 자멘호프 박사의 탄생일(12월15일)을 앞두고 그의 삶과 에스페란토를 소개한 일제하 조선일보 특집기사(1927년 12월 13일자)
세계어 보급을 내세운 민족운동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1920년대 조선일보 지면에는 에스페란토 관련 기사들이 무척 많다. '에스페란토 강습/진남포(鎭南浦) 상공학교에서'(1923년 5월 23일자) 등 강습회 기사는 물론이고 창시자인 자멘호프 박사의 탄생일(12월 15일)이 되면 거의 해마다 특집을 실었다. 1930년대 들어 이 운동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일제가 탄압의 칼을 빼기까지 10여년간 에스페란토는 이 땅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의 자멘호프 박사가 창시할 때부터 '민족 간 평등'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반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이 '세계어'의 보급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중 선구자가 시인 김억이다.

김억은 1920년 6월 YMCA에서 최초의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었으며, 에스페란토로 시를 지었다. 그는 1922년 잡지 '개벽'에 발표한 글에서 "자기의 언어를 피정복자에게 강징(强徵)시켜서 그 고유의 정신을 빼앗는 것으로 유일 정책을 삼는 정복자에게 (국제공통어는) 저주의 맹렬한 찬사를 돌린 것"이라며 에스페란토 보급 운동이 일제에 맞서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김억이 에스페란토 운동가로서 조선일보에 남긴 가장 큰 자취는 1924년 2월부터 5월까지 115일간이나 1면에 연재한 '에스페란토 강좌'다. 문법과 작문을 가르치는 난이었지만 신문 1면 상단에 장기 연재한 것은 '외국어 지상강좌'이상의 의미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이 난에 실렸던 에스페란토 예문의 번역문 중에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것도 있다.

"나는 가슴에 불길을 피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라도 끄지 못합니다.…그 불의 이름은 인류애이며 그 불의 이름은 자유에 대한 사랑입니다."(조선일보 1924년 5월 4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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