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無名군인… 군번으로만 남아 여기 묻혔소

조선일보
입력 2011.06.25 03:08

양구 백석산 901m 정상, 국군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4년간 유해 130구 찾아 그중 7구 가족품에 안겨

1951년 8월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백석산. 최고 해발 1142m 높이 일대 산봉우리에서 국군 7·8사단과 북한군 12·32사단 장병들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두 달 동안 고지를 뺏고 빼앗기기를 6차례. 나중에 미군과 중공군까지 가세, 전황(戰況)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대부분은 스무살 안팎.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 만큼 상황은 엄혹했다.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인식표(군번줄)를 꼭 차고 있어라"는 것이었다. 당시 어린 병사들은 그 말속에 담긴 뜻을 몰랐다.

두 달 동안 일대 산맥을 자욱한 포연(砲煙)으로 메웠던 백석산 전투는 2000여명 전사자(적군 1500여명·아군 530여명)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그리고 60년이 흐른 2011년. 낡고 녹슨 한 조각 군번줄이 산중 고혼(孤魂)이 된 그들을 가족 품으로 인도했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백석산 일대에서 수 시간 땅을 파던 병사들이 흙더미 아래서 발견한 인식표(군번줄) 하나. 6·25 당시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백석산 일대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발견되고 있다. 인식표는 유해 신원 확인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흙 속에 묻혀있던 인식표(사진 위)와 발견된 유해를 수습하고 있는 유해 발굴 감식단원들(아래 사진).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백석산 일대에서 수 시간 땅을 파던 병사들이 흙더미 아래서 발견한 인식표(군번줄) 하나. 6·25 당시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백석산 일대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발견되고 있다. 인식표는 유해 신원 확인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흙 속에 묻혀있던 인식표(사진 위)와 발견된 유해를 수습하고 있는 유해 발굴 감식단원들(아래 사진).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24일 오전 8시 30분. 백석산 정상에 육군 21사단 장병 100여명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병 8명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나타났다. 6·25 발발을 앞두고 선배 전우들 유해를 찾고 있었다. 지난달 30일부터 26일째다.

이곳에서는 지난 10일 누렇게 색이 변한 두개골과 다리뼈, 구겨진 전투화와 함께 줄이 끊어진 군번줄이 흙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찌그러진 철판에 영문 이름과 함께 한국군임을 나타내는 K로 시작하는 군번이 찍혀 있었다. 병적(兵籍)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고 올해 81세인 동생에게 연락이 갔다. 대전에 주인 없는 위패(位牌)로만 남아있던 국군 전사자 1명의 넋이 쉴 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이뿐 아니다. 지난해 10월 백석산에서 발굴, 지난 6일 현충일에 '호국형제의 묘' 안장식을 통해 처음으로 형제가 함께 묻히게 된 이만우 하사 동생 이천우 이등중사(병장) 역시 유해와 함께 나온 군번줄이 결정적 단서였다.

2000년부터 시작한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찾은 유해 5411구 중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 품에 돌아간 전사자는 고작 64구. 1% 정도만 누군지 알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백석산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130구를 찾아 7구를 유가족에게 전했다. 신원 확인 비율이 5%에 달한다. 군번줄이 같이 나왔기 때문에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대령)은 "참혹한 전투 상황 속에서 지휘관은 시신이라도 찾아 거둘 수 있도록 인식표를 챙기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6·25전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나 아직 전국 산야(山野)에 묻혀 있는 전사자 유해는 13만여구. 국방부는 유가족을 대상으로 유전자(DNA) 표본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1만6052명이 등록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주경배 발굴과장은 "유가족이 가까운 보건소에 가 DNA 샘플 채취에 더 많이 참여한다면 유해 발굴이 더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참여 문의 1577-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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