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어느 사업가의 고백 "내가 ICBM (대륙간 탄도미사일)한국에 들여왔다"

조선일보
  • 강훈 기자
    입력 2011.06.25 03:12 | 수정 2011.06.25 14:37

    러시아서 스파이 혐의로 4년째 입국 금지… 현지 부동산·사업체 다 날릴판

    "김대중 정권 시절 러시아 극동지역에 배치됐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고철로 위장해 한국에 가지고 왔습니다. 목숨 걸고 일했는데, 제가 곤경에 처하니 국가는 저를 포기하더군요." 중견 기업인으로 얼마 전까지 국내 한 체육단체의 회장을 맡았던 K씨의 발언이었다. 국가정보원에 확인한 결과,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가 들여온 건 고철 수준에 불과했다"고 했다. "삶을 포기했다"는 K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ICBM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K씨는 1996년부터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사업을 했다. 캄차카 반도의 도시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츠키에 그의 회사가 있었다. K씨는 못쓰게 된 선박을 절단하고 고철 형태로 만들어 포스코 등에 납품했다. 사할린 북동쪽에 위치한 캄차카는 미국 본토를 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가 있는 등 전략적 요충지였다. 군사장비를 많이 취급했던 K씨는 러시아 군부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1997년 러시아 국방부는 그의 회사에 대륙간탄도미사일 폐기 용역을 맡겼다. 길이 30m 둘레 5m가 넘는 탄도미사일을 30㎝ 이하로 잘게 분쇄하는 일이었는데 고체연료 때문에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미사일 잔해는 러시아 측이 전량 회수해 태평양 등 제3의 장소에 투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과 맺은 전략무기감축협정에 따라 캄차카 해안에 배치된 일부 탄도미사일을 없애기로 했다. 폐기될 미사일들은 원래 우크라이나 기지에서 유럽 전역을 커버했으나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캄차카로 이동 배치된 것이었다. 1956년 미국보다 먼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던 러시아는 당시 사정거리 5500㎞ 이상의 SS-18, SS-19, SS-25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K씨는 서울에서 국정원 요원들에게 자신이 맡은 용역을 설명했고, 이때부터 국정원과 그는 극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K씨는 국정원의 주선으로 전문가들을 연쇄 접촉했다. 당시 국정원 측은 탄도미사일 모형을 보여주며 훼손을 최소화하고 반드시 확보해야 할 부위를 알려주었다.

    K씨는 1997년 여름 도시 한복판에 있는 캄차카 형무소에서 탄도미사일을 처음 보았다. 몸통이 3, 4개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엔진 등 추진체 부위는 별도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기밀 유지 차원에서 형무소 일부를 작업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당시 캄차카에는 미사일 폐기를 확인할 미국 감시요원도 있었다.

    K씨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미사일을 빼내기가 불가능해 보였다"면서 "그 무렵 베트남에서도 탄도미사일을 밀반입하려다 적발돼 이에 협조한 해군 제독이 숙청된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K씨도 러시아 군부 인사를 활용하기로 했다. 폐기 작업을 관여하는 미사일기지 사령관(대령)과 정보 장교들이 주요 접촉 대상이었다. 이들과 자주 어울렸고 용돈도 주었다. 덕분에 그의 회사 차량은 형무소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이 수시로 국정원에 전달됐고 지시도 내려왔다. 국제담당 국장과 러시아 과장을 만나 회의도 열었다. 국정원 간부인 처남도 그리 멀지 않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K씨의 활동을 지원했다.

    ◆고철 더미에 숨겨 온 탄도미사일

    1998년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달빛 없는 새벽에만 움직였다. 캄차카 상공을 수시로 지나가는 미국과 러시아의 인공위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파쇄하지 않은 탄도미사일 부품을 트럭에 싣고 12㎞가량 떨어진 부둣가 야적장으로 운반했다. K씨 회사 소유인 이 야적장에는 한국에 납품할 수천t의 고철이 쌓여 있었다. 그는 고철 더미 사이로 탄도미사일 부품을 재빨리 숨겼다. 이러길 10여 차례, 탄도미사일 1기에 해당하는 부품이 그의 회사 야적장으로 옮겨졌다. '포섭'한 군 간부들에겐 "탄도미사일에 사용된 비철금속을 한국 기업에 팔면 돈이 꽤 된다"고 둘러댔다.

    문제는 엔진 등이 있는 추진체 부위였다. 이 부품을 갖고 가겠다고 하면 아무리 친분 있는 군 간부라 하더라도 용도를 의심할 게 뻔했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중인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의 보안부대와 FSB(KGB의 후신)가 K씨의 동선(動線)을 주시하고 있었다. K씨가 총영사관 소속 한국 정보요원과 접촉하는 모습이 목격되었기 때문.

    K씨는 달러를 준비했다. 미사일기지 사령관 등 4명에게 모두 70만달러(약 8억원)를 주면서 "엔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당시 70만달러는 거금이었다. 방 3개짜리 캄차카 아파트 한 채가 6000달러(약 700만원) 할 때였다.

    이렇게 해서 엔진 2개 등 탄도미사일 1기 분량의 핵심 부위가 형무소에서 야적장으로 운반됐다. 여기까지 6개월이 걸렸고 1998년 6월쯤이었다. 이젠 미사일을 한국으로 옮길 차례였다. 캄차카 항구를 떠나는 화물선마다 러시아 정보요원이 승선하는 등 다음 작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K씨는 야적장에 고철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통상 고철 1회 선적 분량은 5000t 정도 되는데 양을 다 채우기 전에 싣고 떠나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었다.

    1998년 11월 하순 출항이 결정됐고, 길이 130m 되는 러시아 선적(船籍)의 화물선을 빌렸다. K씨 회사의 전용 부두에서 선적이 시작됐다. 15층 건물 부피의 고철 5000t을 배에 싣는 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K씨는 고철 더미에 감춰진 미사일 부품 위치를 눈에 꼭꼭 담아 두었다. 한국에서의 신속한 하역을 위해서였다. 러시아 정보 요원들이 선적 작업을 살피러 올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다행히 의심을 받진 않았다.

    드디어 화물선 닻이 올라갔다. 오호츠크해와 사할린 남단을 지난 배는 동해로 진입했고 한반도를 돌아 일주일 만인 11월 30일 오후 인천항에 접근했다. 배는 무사히 동국제강 전용 부두에 접안했다. K씨는 출항 직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항공편을 이용해 한국에 들어와 배를 기다렸다.

    ◆작전은 모두 세 차례

    국정원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1961년 국정원 창설 이래 가장 큰 프로젝트가 성사되기 직전이었다. 요원들이 먼발치서 숨죽이며 하역 작업을 지켜봤다. K씨는 탄도미사일이 은닉된 부분과 순수 고철 부분을 신속하게 분리 하역했다. 사흘 만에 고철을 모두 풀어놓은 화물선이 항구를 떠났다. 국정원은 K씨에게 탄도미사일 부품을 대전 항우연까지 직접 운송해줄 것을 주문했다. 국정원이 '물건'을 인계받을 경우 주변 열강의 감시위성에 들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t짜리 대한통운 트럭 2대에 탄도미사일 부품이 꽉 들어찼다. 트럭 2대가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대전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고, 국정원의 헬리콥터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트럭의 뒤를 쫓았다. 4시간 만에 트럭은 대전 인근에 있는 국정원 건물로 빨려 들어갔다. 1998년 12월 2일 해질 무렵이었다.

    K씨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성대한 자축연이 이어졌고 국정원 요원들은 전무후무한 쾌거라고 기뻐했다. VIP에게도 작전 성공 사실이 곧바로 보고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듬해 3월 13일 당시 이종찬 국정원장은 K씨에게 표창장을 주었다. "특히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K씨와 국정원의 프로젝트는 이후 두 차례 더 진행됐다. 2000년 12월 2일에는 탄도미사일 세부연결 부품을 가져왔고 2001년 11월 10일에는 엔진 3개와 노즐 연결 부품을 들여왔다. K씨는 "국정원측은 당시 반입한 탄도미사일을 복원해 위성 개발에 참고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국정원은 러시아의 다른 전략무기도 가져와 달라고 요구했지만 K씨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적발되면 사업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데 쉽게 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K씨는 본업에 전념했고 사세는 번창했다. 고철 수입과 선박 절단 사업 외에도 부동산 개발 및 여행 사업을 벌였다. 캄차카에 호텔 건립을 추진하는 등 계열사 5개를 두었다. K씨는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국정원에서 격려금 1만달러를 받았지만, 워낙 사업이 잘됐기에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데 만족했다"고 했다. 러시아 미사일기지 사령관 등은 뇌물을 받고 얼마 뒤 모두 전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돌발 상황과 외면하는 정부

    그렇게 6년이 흘렀다. 문제는 2007년 4월 벌어졌다. K씨가 서울에 왔다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되돌아가는데 입국이 금지된 것. 당시 러시아 극동사령부 고위 관계자에게 경위를 물어보니 "스파이와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K씨는 계열사로 둔 법무법인을 통해 자체 조사에 나섰다. 한국 정보기관에 협력하는 기업인으로 찍혀 5년간 입국과 사업 행위가 금지된 것으로 파악됐다. 다행히 러시아 측은 탄도미사일 프로젝트를 모르는 듯했다. 당시 극동 일대에서 한·러 간에 심각한 외교 갈등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K씨가 유탄(流彈)을 맞은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그는 난감해졌다. 대부분의 재산이 러시아에 있었기 때문. 국정원에 도움을 요청하자 "우리가 나서면 더 오해받는다"며 난색을 표했다. 외교통상부를 찾아갔지만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는 직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 정보국 간부로부터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러시아 외교국으로 공문을 보내면 입국금지가 쉽게 풀릴 수 있다"는 암시를 받았지만, 외교부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민원실 직원들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상급자를 만날 수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말단 직원에게 극비 사항을 공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빠른 시간 내에 러시아로 돌아가 200억원가량 되는 자산을 처분하고 싶었지만, 현지 직원 월급만 축내는 시간이 계속됐다. 국내 금융기관에선 자금 압박이 시작됐다.

    그는 2009년 12월 28일 청와대 신문고에 정식 민원을 넣었다. 탄도미사일 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입국금지를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민원은 법무부로 이첩됐다가, 일주일 뒤 국민권익위원회로 넘어갔고, 다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실, 외교통상부에 재배정되었다. 민원은 탁구공처럼 왔다갔다를 반복했고 정부는 담당 부처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민원이 배정된 국정원에선 인터넷 사이트에 '처리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는 "울화통이 터져 국정원에 항의했더니 민원 담당 직원이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요구하는 등 2년간 외교부에서 겪은 일이 그대로 반복됐다"며 "내 신분과 민원접수번호를 알려주고 회신을 기다렸으나 반응이 없었고 그 뒤부턴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최근 국정원에서 통보를 받았다. 입국금지 조치가 탄도미사일 반입과 무관한 것으로 보여 국정원에서 실질적으로 도와줄 방법이 없고 그 담당 부처도 외교부라는 것이었다. K씨가 러시아에 못 들어간 지 4년째, 최근 그의 재산은 현지 은행과 경쟁업자에게 압류되었다고 한다.

    그는 "올해 초만 해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면서 "목숨 바쳐 일하고도 국가에서 버림받는 나 같은 국민이 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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