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1000만부 '성문종합영어' 저자 송성문의 '인생 4막'

조선일보
  • 문갑식
    입력 2011.06.25 03:12 | 수정 2011.06.27 17:53

    영어로 번 돈으로 나라 보물 발굴… 그는 인생의 참고서
    6개월 시한부 판정 받고 8년… 암과 싸우면서 壽石 참고서도 펴내

    소년은 평북 정주(定州)의 영재(英才)였다. 정주중학을 3년 반 만에 마치고 정주고급중학에 1기로 입학해 우등 졸업했다. 다음 목표는 김일성대 영문과였다. 북한 최고 인재만 모인다는 곳이었다. 그의 합격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결과는 탈락. 아버지가 천도교 청우당원이라는 이유였다. '혁명열사'의 후손들만 판치는 세계였다. 삶의 행로(行路)가 여기서 처음 뒤틀렸다. 2년제 신의주교원대에 들어갔다. 그는 교사로 6·25전쟁을 맞았다. 그해 11월26일 미군이 신의주에 진주했다.

    그는 집으로 찾아온 한 미군 앞에서 엉뚱한 짓을 했다. 중학 영어교과서를 읽어댄 것이다. 미군이 말했다. "통역이 되겠느냐? 함께 평양으로 가자!" 인생의 방향이 여기서 다시 바뀌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병사를 따라나섰다. 부모와 형제들이 큰아들을 배웅했다. 떠나는 이도, 보내는 이도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평양에서 중공군의 역습에 당황한 미군은 그를 내던지고 혼자 내뺐다.

    전쟁과 공산주의 속에서 송성문(宋成文·80)의 청춘은 천변(千變)했다. 운명이 이토록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면 1000만권 이상 팔린 '성문종합영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6ㆍ25 때 단신 월남… 통역장교하다 교사로
    잘 가르친다 소문나자… 당시 집 한채 값 주며 영어참고서 써달라 해

    제1막-월남, 군인, 교사

    ―전전(戰前) 북한에 사셨으니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아시겠네요.

    "당연히 북한이죠. 이북에서는 1947년부터 남침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어요. 50년 에는 만주에서 팔로군(八路軍)을 매일 실어날랐고요."

    ―미군 앞에서 영어교과서를 읽을 생각은 왜 했습니까.

    "전쟁이 터지자 학교에서 한 달간 대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때 '안 되겠다' 싶어 집으로 몰래 빠져 나왔지요. 그러다 미군이 진주했는데…, 저도 그때 왜 그리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팔자(八字)였던 모양입니다."

    ―미군이 1·4 후퇴 때 평양에 선생을 남겨놓고 떠난 뒤엔 어떻게 하셨습니까.

    "황당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차 얻어타고 구걸해가며 부산까지 내려갔지요. 부두에서 '체커(checker)'일을 해 먹고 살았어요. 화물이 선적(船積)되는 걸 감시하는 일입니다. 1952년 입대해 통역장교가 됐지요."

    ―전쟁 중에는 장교가 제일 편하지요.

    "덕분에 6·25를 편하게 지낸 셈이 됐지요. 미군 고문관과 함께 다녔으니까요. 그렇지만 복무하면서도 제대 후 뭘 해야 할까 걱정을 꽤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영어검정고시를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운 좋게 중등과정, 고등과정 둘 다 합격했어요."

    ―시험만 보면 붙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랑 같지만 영어검정고시 두 과정에 패스하는 건 서울문리대 영어과를 나와도 힘들다고 했어요. 복무하면서 동아대 야간과정도 이수했고요."

    ―서서히 '성문종합영어' 탄생 쪽으로 옮겨가는 느낌입니다.

    "대위로 제대한 후 부산고에서 1년간 임시교사를 했고 마산고로 옮겨 정교사를 했습니다. 마산고에서 1962년부터 3학년 담임을 맡았어요. 당시 제자 가운데 한명이 안상수 한나라당 전 대표였습니다. 종합영어를 쓴 건 서울에 있는 성문각(成文閣)이란 출판사 사장의 권유가 직접적인 이유였어요."

    ―부산고, 마산고가 명문이지만 지방학교인데 참고서 쓰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면 꽤 명성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성문각 사장이 이성우씨라고 전국에 수금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허허, 제가 꽤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났던 모양인데 그걸 이 사장이 들은 것 같아요. 그가 당시 돈으로 200만원을 계약금으로 내놓더군요. 집 한 채 살 만한 액수였습니다. 책 쓸 시간은 1년을 줬고요. 돈도 돈이지만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대로 된 참고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요."

    ―성문종합영어가 지금은 구식 참고서 취급받지만 예문(例文)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죠.

    "예문은 결국 자료수집의 문제인데 제가 두 번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중 한번이 당시 문교부에서 전국 교사 중 2명을 뽑아 8개월간 연수를 보내주는 것이었는데 그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문제가 '신금단(辛今丹) 사건'이었어요."

    ―신금단?

    "신금단은 북한 육상선수였는데 동경올림픽 때 남쪽의 아버지와 상봉한 거지요. 문제를 보니 참 막막하더군요. 다른 선생님들은 쑥쑥 잘 써내려가고 있는데 전 20분간 한줄도 못썼어요. 그때 갑자기 '사지절단'이란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몸은 절단됐지만 마음은 신금단처럼…'하는 식으로 썼는데 합격된 겁니다."

    ―처음에 책 이름이 '정통종합영어'였지요.

    "성문각에 원래 '정통'시리즈가 있었거든요. 제일 유명했던 게 '정통고문(古文)교실'이란 책이었고요. 책이 1967년 3월에 처음 나왔는데 대박을 쳤습니다. 1년에 1만5000부나 팔렸으니까요. 서울대 입시문제에 제 책의 지문과 똑같은 문제가 출제돼 유명세를 탔고요."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송성문은 국보와 보물을 남겼다.평생 동안 수집한 수석을 등지고 선 그는 "수석은 군자의 마지막 취미"라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제2막-학원강사, 종합영어

    송성문은 마산고에서 경기고와 함께 전국 최고라 불리던 명문 서울고로 옮겼다. 그런데 학원가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단과반을 맡아달라고 줄기차게 조른 것이다. 결국 그는 종로에 있는 경복학원 강사로 다시 변신하게 된다.

    ―왜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이 아니고.

    "당시 경복학원장이 황순필씨였습니다. 소설가 황순원씨의 동생인데 서울고를 나왔습니다."

    ―당시엔 과외를 제외하면 단과(單科)가 유일한 사교육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지요. 제가 1200명을 놓고 강의한 적도 있어요. 스피커를 달고 강의했는데 하도 여러 반에 분산시켜놓았으니 제 얼굴을 못 보고 목소리만 들은 학생이 많았을 겁니다. 그 기록은 아직도 안 깨졌을 겁니다."

    ―돈도 많이 버셨겠네요.

    "월급이 500만원이나 됐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김우중씨가 대우실업을 세울 때 가진 돈이 딱 그 액수였다더군요."

    ―일설에는 성문종합영어가 일본 책을 베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시중에 나온 영어 참고서는 '메들리 삼위일체'가 유일했어요. 그걸 참고하긴 했지만 베낀 건 아닙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오해하는데 종합영어는 문법서가 아니라 독해력 참고서입니다. 제가 수집한 예문이 시대에 따라 변치 않는 주옥같은 것들이지요."

    ―종합영어가 요즘도 많이 나갑니까.

    "제가 책을 낼 당시엔 볼만한 게 없었으니까, 녹음기도 구하기 어려웠고. 요즘은 원서(原書)를 쉽게 구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1년에 몇만부는 나갑니다."

    ―1976년에 성문각을 떠나 성문출판사를 차렸지요. 성문각·성문출판사 모두 선생의 이름과 관련이 깊습니다.

    "학원강사 생활을 8년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한 강좌에 100분 수업인데 다섯 강좌를 했으니까요.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출판사를 차렸는데 성문각에 종합영어, 핵심영어 학습서는 그대로 놔두고 나왔어요. 그 학습서는 출판사 편집부원들이 쓴 건데 나중에 읽어보니 너무 부실했어요. 그리고 제 본명이 원래 송성문이 아닙니다."

    ―예?

    "본명은 석문(錫文)인데 구개음화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겁니다. 남한에 내려와 가호적을 만들며 바꿨는데 나중에 점쟁이에게 물어보니 석문이란 이름을 썼으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됐을 팔자였다더군요. 성문은 돈을 벌 팔자고."

    ―책과 학원에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 어떻게 투자했습니까.

    "제가 부동산 투자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살 집만 있으면 되고 지금 인터뷰하는 이 5층 건물 하나 정도예요. 만일 부동산 투자했으면 지금쯤 대단한 갑부가 됐을 겁니다. 1970년대 강남엔 이 건물과 맞은편 건물 정도밖에 없었으니까요. 대신 수석과 고서 수집을 했죠."

    ―수석은 왜.

    "탁기준이라는 친구 때문에 입문했어요. 70년대 그 친구가 돌멩이를 잔뜩 가져와 사달라더군요. '용돈이 필요한가 보다' 싶어 그때 돈으로 30만원 줬는데, 그 이후 수석에 푹 빠졌다니까요. 문 선생도 수석 한번 해봐요. 그 돌 안에 자연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주 오묘해요, 군자(君子)의 마지막 취미이기도 하고."

    ―얼마 전 수석 관련 책을 내셨죠. 굉장히 두껍던데요.

    "한번 정리하고 싶어서 쓴 겁니다. 수석을 수집하는 걸 탐석(探石)이라고 하는데, 거 운동도 되고 아주 재미있어요. 끝나고 강변에서 돼지고기 굽고 소주 한잔 하는 맛도 각별하고요."

    통일되면 고향 정주에 박물관 세우려고 古書 수집나서
    암 판정 받은 뒤… 국보ㆍ보물 등 100여점 국립박물관에 기증

    제3막-고서·수석

    송성문은 고서 수집의 대가다. 그가 모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서 중에는 국보(國寶)가 2점, 보물(寶物)이 22점이나 된다. 간송 전형필이 일제강점기 귀중한 우리 유산을 지켰듯 그는 종합영어로 번 돈을 국보 발굴에 썼다.

    ―고서 수집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그것도 전문(田文)이라는 친구 권유로 시작한 건데,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만일 훈민정음 원본을 몰라보고 쭉 찢어서 벽지로 썼다고. 우리가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지만 잘 보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 구입한 서적이 기억납니까.

    "왕지(王旨)라고 왕이 관리에게 내리는 임명장이었습니다. 그 책 이후에는 중국이 왕지라는 말을 못 쓰게 했어요. 교지(敎旨)라고 바뀐 거지요. 500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정말 표지며 잘 만든 책인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고서 수집을 하면 속는 일도 있지 않나요.

    "그림이나 도자기는 가짜가 많지만 고서는 그리 쉽게 속일 수 없어요. 전문가들의 감정도 받았으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소장했던 고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걸 꼽는다면요.

    "대보직경이라고 감정가가 1억원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 모은 후에 문화재청에 국보·보물 지정 신청을 했지요."

    ―그럼 보관도 잘해야겠습니다.

    "보관은 별다른 거 없어요. 보자기에 둘둘 말아 반닫이에 넣어놓으면 그만이니까.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도둑맞을 걱정은 안 해봤습니까.

    "실제로 도둑이 든 적이 있어요. 그런데 값싼 것만 가져가고 고서는 손도 대지 않았더군요. 못 알아봤을 겁니다."

    ―부인이 왜 '부동산 투자나 하지 돌과 옛날 책만 사들이느냐'고 하지 않던가요.

    "아내가 책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수석은 잔소리를 조금 했지요. 돌멩이 가져온다고. 사실 한번은 수석이 갑자기 하기 싫어져 석 달 동안 탐석을 안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결국 다시 시작하게 됐지요."

    ―책을 모은 목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수집한 겁니까.

    "처음엔 통일되면 제 고향 정주에 박물관을 하나 세우려고 했지요. 그래서 모은 게 100권 정도 됩니다. 저만 유별나게 고서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서양서도 청자, 백자를 소중히 여기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문자(文字), 즉 고서입니다."

    왕이 관리에 내리는 임명장인 '왕지' 감정가 1억원 '대보직경'도 수집
    고려 금속활자본 하나 구하는 게 내 마지막 목표

    ―귀중한 책을 많이 모았는데 그래도 탐나는 책이 있습니까.

    "제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을 하나 구하는 겁니다. 그걸 못 보고 죽으면 한(恨)이 될 거 같아요. 어느 절의 부처님 복장(腹藏) 안에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열심히 모은 고서를 왜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까.

    "그때 암 판정을 받았으니까요. 암과 싸우자면 책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1년에 한 번씩 문화재청에서 제 집으로 와 책 검사하는 것도 귀찮았고요."

    돌과 그림 앞에 선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사람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제4막-말기 암

    송성문은 고서 외에 운보 김기창의 동해일출(東海日出)이란 대작 그림 한 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자신이 기증한 고서 전시실 앞에 그 그림이 걸리길 바랐다. 그런데 그림은 창고 속에 박혀 있다고 한다. "운보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를 대던데 참 아쉬워요. 보고 있으면 파도가 정말 밀려드는 느낌이 드는 굉장한 작품인데…."

    ―3년 전 전주상산고 홍성대 이사장을 인터뷰했을 때 선생의 행방을 탐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면서 "오래전 미국으로 갔다더라"고 하더군요.

    "2003년 아산병원에서 판정을 받았어요. 11㎝짜리 사과만 한 간암(肝癌) 덩어리가 나왔지. 그때부터 기자들을 피해왔어요."

    ―몸속에서 암이 그렇게 자랄 때까지 왜 방치한 겁니까.

    "건강에 자신이 있어서 신체검사를 5년에 한 번 했어요. 혈액검사도 꼬박했는데 그걸로는 암을 다 못 잡아낸 대요. 20% 정도가 그렇답니다. 암 발견한 건 우연이었어요. 제가 의사 선생께 물어봤거든. '콜레스테롤 치료제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던데요.' 그분이 '그럼 초음파 검사 받아보세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했더니 나왔어요."

    ―시한부 판정을 받을 때의 기분이 어땠습니까.

    "멍하고 뭐랄까, 왜 나한테 이런 게 생겼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습니다. 아산병원에서 색전술 수술을 받은 뒤 더 좋은 데 가서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고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 갔어요. 담당의가 한국인인데 절 알아보더군요. '선생님 종합영어로 공부했다'고. 그러면서 그래요. '사실 수술은 미국보다 한국이 더 잘합니다. 돌아가시라'고요."

    ―미국 잠적설이 그때 나온 거군요.

    "이왕 미국에 온 거 한 번만 더 진찰받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대학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해요. '수술은 미국보다 한국이 최고'라고. 그래서 석 달 만에 돌아왔어요. 잠적은 무슨."

    ―6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8년을 더 살고 계십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치료받는 것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홍삼(紅蔘) 엑기스 같은 것도."

    ―'영어실력기초' 쓰신 안현필(安賢弼)선생이 예전에 건강서를 내셨죠? 현미와 식초를 장복(長服)하라고.

    "그분 저도 잘 알아요. 학원강사도 같은 시절에 했고 그 책도 읽었지요. 그런데 의사들은 그런 걸 싫어해요. 사실 건강이 더 악화되거나 하진 않아요. 입맛이 없어 뭘 잘 못 먹을 뿐이죠. 그래서인지 78㎏이던 몸무게가 58㎏으로 줄었습니다."

    ―혹시 식성(食性)이 특이하십니까.

    "내가 소주에 돼지고기를 좋아하긴 했지요. 그거 맛이 끝내주거든. 이만큼 버티는 건 젊었을 때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많이 걸었어요. 출퇴근 때 대모산도 넘고. 돌이켜보면 그게 보험(保險) 든 셈이었어요."

    ―투병을 하면 가족들 도움이 절실하지요.

    "아내가 몇 년 동안 치매를 앓았어요. 제가 돌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요양병원으로 보냈습니다. 한 달에 몇번 찾아가고 있어요. 제가 2남1녀를 뒀는데 지금은 큰아들 며느리가 절 보살펴주고 있어요. 아침 9시 조금 넘어 여기 나와서 수석 보고 오후 2시쯤 집에 돌아가는 게 일과의 전부입니다. 신문 3개 꼼꼼히 읽은 뒤엔 일찍 자지요."

    ―그런데 8년간 참고서를 썼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참고서 인생인가 봐요. 영미명문선(英美名文選)을 비롯해 영어 참고서 3권 썼고 얼마 전엔 수석(壽石) 참고서 썼잖아요."

    ―선생께서 살아오신 길을 들으니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혹시 미련이 남는 게 있나요.

    "지금은 병원도 잘 안 가요. 의사 선생이 오라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하고 있어요. 암이 왼쪽 다리 골수로 전이됐다더군요. 색전술 받는 것도 지겨워요.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살 만큼 살았잖아요."

    송성문은 2차례에 걸쳐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석의 맛을 가르쳐주고 싶은 듯 돌에 물을 뿌리며 "이게 우후청천(雨後晴天·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겁니다"라고 입문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오전에 잠시 거리의 햇볕을 쬔 뒤 34평 아파트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낼 노인은 떠나는 기자에게 글귀 하나를 다시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일성이득일석난구(一城易得一石難求)-성 하나를 얻기는 쉽지만 돌 하나를 구하기는 어렵다!"
    ‘성문종합영어’ 저자인 송성문씨. 최근 간암 투병을 하면서도 40년 수석 인생을 되돌아보며 '수석' 책을 발간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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