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선임기자의 현장 리포트] 가난한 건국 부통령 후손들… 며느리·손녀는 무허가 집에 거주

조선일보
  •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2011.06.07 03:04

    [독립운동 헌신 초대 부통령 이시영… 그의 후손은]
    이시영이 臨政 따라 떠나자 셋째·넷째아들 만주서 아사
    명문고등학교 나온 손자들, 돈 없어 대학 졸업하지 못해
    이시영 묘 국유지에 방치… 100세 며느리가 40년째 지켜

    이시영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일대에 애국선열의 묘(墓) 17기가 흩어져 있다. 호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남으로 300m쯤 내려오다 왼쪽 북한산 등산로 방향이다. 그 중간 중간엔 쓰러질 것 같은 무허가 집과 닭도리탕 음식점이 여럿 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副統領)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1869~ 1953)의 묘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비가 뿌리던 지난 1일 낮 찾아본 그의 묘는 한눈에 보기에도 허술했다. 뗏장이 군데군데 파여 나가 맨흙이 드러나 있었다.

    성재의 유해는 1953년 사망한 후 서울 정릉에 임시 안치됐다. 지금 자리로 옮겨진 건 1964년이다. 그 후 47년간 나라에서 관심을 기울인 건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성재 손자의 하소연을 듣고 진입로를 다듬어준 게 유일하다.

    건국(建國) 부통령의 묘는 올 4월 5일에도 일부가 무너졌지만 누군가 임시로 손봐놓았다. 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국립묘지가 아닌 이런 국유지에 있을까.

    "동작동으로 옮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말석(末席)이었습니다. 대전국립묘지로 오라는 말도 있었지만 1402년부터 서울을 지켜왔는데 그리 갈 순 없었습니다."

    정부는 이시영 건국부통령의 묘를 방치해왔다. 이 부통령의 손자 이종문씨가 맨흙이 드러난 묘를 가리키고 있다. /문갑식 기자

    성재의 손자 이종문(李鐘文·71)은 "4·19국립묘지에 이곳을 포함시키면 쉽게 풀릴 일"이라고 했다. 그는 보훈처에서 수리비를 준다는 말을 듣고 서류까지 준비해 찾아갔다가 상한액이 100만원에 불과한 걸 알고 포기한 일도 있었다.

    이시영의 묘 아래 수유동 산127번지라는 문패가 달린 무허가 집이 있다. 규모가 12평인 이곳에서 올해 100세인 성재의 며느리 서차희(徐且喜) 여사가 살고 있다. 서씨는 한때 비닐하우스였던 여기서 시아버지 묘를 40년 넘게 돌봤다.

    그는 지금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 여사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린 막내딸과 함께 산다. 막내딸은 장애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병을 앓고 있는 셋째 아들은 기자가 온다는 소식에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올해 100세 된 성재의 며느리 서차희 여사는 시아버지가 잠든 곳 바로 근처 무허가 집에서 40년째 시묘(侍墓)하고 있다. 서 여사의 왼쪽은 막내딸이다. /문갑식 기자

    집에선 자원봉사 여성들이 파전을 만들고 있었다. 임순화씨는 "작년에야 이 부통령 며느리가 계신다는 걸 알았다"며 "한국에서 독립운동가는 우리 같은 사람 아니면 안 돌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잊혀진 건국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독립투사의 자식은 불우하다"

    그는 한일 강제 병합 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매진 했다. 광복 후 그 일가가 조국으로 돌아왔다. 6명만 살아왔고 모두가 병사(病死)했다. 독립운동의 대가를 제일 톡톡히 치른 건 바로 성재 자신이었다. 첫 아내(김홍집의 딸)는 청일전쟁, 재혼 아내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던 해 사망했다.

    성재는 아들 넷을 뒀다. 첫째는 자식 없이 1960년대 사망했다. 셋째와 넷째는 아버지가 임시정부를 따라 떠나자 만주에서 구걸하다 2살, 3살 때 아사(餓死)했다. 둘째 아들(이규열·李圭悅)은 성재보다 100일 앞선 1952년 사망했다.

    이규열은 아내 서차희와의 사이에 4남2녀를 뒀다. 장남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됐지만 4살 때 사망했다. 둘째 종문(71)은 경기중·고를 나와 성균관대 법정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결국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는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자문위원으로 월 190만원 정도를 번다. 그의 아들 둘은 모두 직장이 없다. 건국부통령의 후손 중 소득이 있는 이는 그와 서 여사가 받는 월 136만원의 연금뿐이다. 밑 동생 종건(鐘建·67)은 성남에서 산다.

    종택(鐘澤·63)은 경기여고, 이대 영문과를 중퇴한 누나 종순(鐘舜·75)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병 때문에 귀국했다. 큰딸 역시 남편 사후 생활고를 겪다 돌아왔다. 막내 재원(再元·61)은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어머니 곁에 있다.

    이시영의 손자들은 경기고·경기여고·동성고 같은 명문고를 나왔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이는 한명도 없다. 성재가 남긴 재산이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원래 성재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명신(名臣)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직계다.

    광복 후 성재를 '형(兄)'이라 불렀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제국이 망하기 전까지 그의 소유였던 서울 중구 저동 13번지 2만평을 찾아주려 했지만 성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내 집 찾으려 만주를 돌며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이 대통령이 서울역 염천교 옆 옛 코트라 자리를 임대해주려 했지만 그것도 거부당했다. 그 정신은 후손에게도 이어졌다. 서 여사가 고생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부에서 주택 제공의사를 밝혔지만 성재의 후손들은 이렇게 거부했다고 한다. "가난한 건 우리가 못났기 때문이다."

    남산 동상도 옮겨야 할 처지

    이종문은 "백범(白凡·김구)은 일지(逸志·일기)를 남겼지만 할아버지는 일경의 눈을 피해 옮겨다니는 마당에 일기가 발각되면 동지들이 검거될 것을 우려해 붓글씨 몇점 외엔 아무것도 안 남겼다"고 말했다.

    묘와 더불어 유일한 그의 자취는 서울남산공원 백범동상 맞은편 동상이다. 1986년 최기원 전 홍대 교수에게 의뢰해 만든 동상은 높이 5.7m로 좌우에 호랑이상(像)을 두고 있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가 남산 재정비사업을 벌이며 성곽(城郭)을 복원하면서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새 장소는 백범동상 오른쪽으로 정해졌으나 분향공간과 좌대와 부조 사이의 간격을 넓히는 문제를 두고 서울시와 마찰을 빚고 있다.

    성재의 후손들은 "2년 동안 서울시 담당팀장만 3명이 바뀌면서 예산 타령만 늘어놓고 있다"며 "올해 4월 17일 열렸어야 할 추모식도 치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시영 선생은 누구]

    만주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고종 탈출작전 감행한 상해 임시정부의 핵심 멤버
    일본도 만주의 無冠王이라며 그의 항일독립투쟁 두려워해

    이시영 일가는 1910년 12월 서간도로 갔다. 모두 69명이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등졌다. 평남 관찰사, 한성재판소장 등 요직을 지낸 그는 가산을 정리했다. 당시 돈 500만원으로 엄청난 액수였다.

    그 자금으로 이듬해 만주에 세운 게 신흥무관학교다. 이범석·지청천 같은 맹장 800명을 배출한 이 학교는 청산리대첩의 뿌리다. 1918년엔 고종 탈출작전도 감행했다.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조선국권회복단사건'이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핵심 멤버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서 초대 부통령을 지내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해 직(職)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그를 '한국현대사에서 퍽 흥미롭고 소중한 존재'라고 했다.

    "그는 조선왕조 홍문관 교리에서 대한민국 부통령에 이르렀다. 전통 유교 교육을 받은 인물이 민족의 수난 극복과 현대 국민국가 수립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역사적으로 주목할 소재다…." 그를 반대 입장인 일제는 어떻게 봤을까.

    "이시영은 만주의 무관왕(無冠王)이요, 만주 일대의 살인강도 두령(頭領)이다!"(마이니치신문) 이렇게 평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지만 그 자신과 후손은 철저히 몰락했다. 불행의 다른 원인은 독립운동가를 외면한 우리에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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