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철중의 의인(醫人)열전] 영원한 '청년의사'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입력 2011.06.04 03:02

"혁신적으로, 헌신적으로…나는 병원을 고치는 의사"
신종플루 유행 때 전담진료센터 설치… 전국적 명성 얻어

경기도 고양시 관동대 의대 명지병원에 들어서면 국내 다른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아전용 응급실은 놀이동산처럼 꾸며져 있고, 정신과 입원 병동은 마치 휴양지의 팬션같이 통유리의 녹색 정원에 파묻혀 있다. 암 환자가 방사선 치료실에 들어서면 환자 취향에 따라 선택된 색깔의 조명으로 확 바뀌고,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항암제 주사실에 오는 환자들에게는 아이패드가 지급돼, 주사를 맞는 2~3시간 동안 개인별 건강관리 요령을 읽어 보고, 드라마나 영화도 볼 수 있다.

이 병원의 모토는 '환자 제일주의(第一主義)'다. 다소 촌스럽게 들리고 직설적이다. 하지만 환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겠다는 명확한 '의료 이데올로기'다. 이를 이끄는 주인공은 47세의 '청년의사'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다. 그는 병원 경영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대학병원, 중소병원, 지방병원, 요양원 등 5개 병원 1500병상을 거느린 '병원 거물'로 컸다. 한국 병원에 새 바람도 불어넣고, 돌풍도 일으킨다.

28세에 의료신문 '청년의사' 발행인, 34세에 국내 최연소 병원장, 45세에 최연소 대학병원 의료원장. 그에게 줄줄이 달린 기록과 직함만 보면 서울의대 출신 외과 전문의의 승승장구 출세기다. 하지만 그 과정은 학생운동으로 옥살이까지 했던 곡절의 삶이요, '맨주먹 붉은 피'로 이뤄낸 험난한 길이었다.

암 치료를 받는 방사선 치료실이 온통 빨갛다. 환자가 파란색을 원하면 조명은 파랗게 변한다.‘ 환자카드’를 치료실 입구 센서에 대면 환자가 미리 선택한 조명이 비친다. 음악도 환자가 선곡해 놓은 것이 30분 암 치료를 받는 동안 흘러나온다. 벽면의 모니터에는 환자가 점찍어 놓은 사진이 뜬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환자 취향별 맞춤 치료 환경을 도입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방사선 치료대 위에 앉아 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1970년대의 '엄친아'

그는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와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연달아 전라북도 수석을 했다. 해외여행을 꿈도 못 꾸던 시절,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학생 토론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아무나 배우지 못했던 바이올린을 어려서부터 익혀 연주가 수준급이었다. 부친은 내과 개업의였다. 과거 동네 의원이 그랬듯 아래층은 진료실, 위층은 살림집이었다. 아버지를 보면서 느낀 의사의 삶은 '징역'이었다. 등교와 하굣길의 부친은 언제나 진료실 그 자리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홍시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노래지고(추석이 다가오면 환자가 준다), '유비무환'(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 등 병원 경영의 패턴을 그는 어려서부터 체득했다고 한다.


운동권→수배자→옥살이

서울의대에 입성한 이 '지방 학생'은 이제 '서울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민주화 격동의 시대가 그를 의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만 놔두지 않았다. 독서서클에 가입하면서 사회과학 서적의 세례를 받았다. 월곡동 꼬방동네의 야학 활동은 사회 운동에 대한 허기(虛飢)를 더 느끼게 했다. 급기야 운동권 서클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거절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의사 집안 출신이고, 잘 나가는 의대생이고, 공부로 잘난 체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이 3가지 '업보'를 뛰어넘기 위해 더 열심히 달려들었다. 그 결과, 조직부장이라는 '핵심 세력'이 됐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서울대출신 외과전문의 학생운동하다 옥살이… IMF로 실업자 신세도

빚더미 병원 인수 후 응급실 야간당직 100일… 병원 정상화될 때까지 월급 80만원 받고 일해

병원경영 13년 만에 5개 병원 1500개 병상 거느린 ‘병원 거물’로


수배를 피해 다니다 걸린 결핵의 흔적은 훈장처럼 몸에 남았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1등 노이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사는 법을 그때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권을 하면서 조직 관리, 기획력과 추진력을 익혔다"며 "이는 후에 여러 직종과 인간 군상이 모인 병원을 경영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청년의사', 신문을 내다

9년 만에 의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그만의 사회 운동을 시작한다. 신문 발간이다. 뒤늦게 의사의 길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운동권 조직부장' 출신답게 의대생과 젊은 의사 350명을 규합하고 신문사 출자금 5억원을 모았다. 그리고는 '반성과 개혁'이라는 모토로 월간신문 '청년의사'를 1992년 창간한다. 인턴·레지던트를 하는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글을 쓰고, 신문 지면을 만들었다. MBC 의학 드라마 '종합병원' 제작 과정에도 참여했다. 탤런트 이재룡 분 외과의사 역의 실존 모델이 됐다. 현재 '청년의사'는 매주 40면을 발행하는 의료계 대표 전문지로 성장했다. 당시 창간 멤버들은 이제 의대 교수와 개업의사가 되면서 의료계 주역들로 활동하고 있다.


외과 전문의, 백수가 되다

레지던트 4년차에 맞은 결혼 당시, 함잡이에 현재의 송영길 인천시장,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이정우 변호사 등 운동권 동료가 동원됐다. 1997년 그는 외과 전문의를 취득했지만, 졸지에 백수가 됐다. 애초에 취직하기로 했던 병원이 'IMF 금융위기'로 경영난에 빠지면서 외과 과장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데 갈 곳도 없었다. 병원들은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전문의 백수' 생활이 수개월 이어졌다. "아이가 첫돌인데 월급봉투는 없고, 집에 들어갈 힘이 없더라고요. 가슴이 시려질수록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었지요." 벼랑 끝에 뜻밖의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서 망한 병원 하나가 있는데 맡아서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동네의원도 해본 적이 없는 그는 덥석 병원 경영에 뛰어들게 된다.


100일간의 야간당직

인수할 병원은 노사분규, 의료진 부실, 산더미 부채 등 문제 덩어리였다. 'IMF' 직후라 시기도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병원 인수를 위한 경제적인 도움을 청했지만, 부친은 "식구를 먹어 살려야 할 가장(家長)인 내가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부채를 떠안고, 병원 건물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일단 문을 열었다. 말은 최연소 병원장이었지만, 실은 '화려한 빚잔치'의 주연이었다. 그는 병원을 '인천사랑병원'으로 이름 짓고, 병실에서 먹고 자며 100일간 응급실 야간 당직을 섰다. 말 그대로 가진 건 '맨주먹 붉은 피' 하나였지만, 진정 환자를 위하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레지던트 시절, 나중에 병원장이 되면 시도해보겠다고 적어놓은 '환자 프로그램' 노트를 꺼냈다. 병원이 정상화될 때까지 직종 최저 월급을 받겠다고도 선언했다. 그의 월급은 청소요원과 같은 80만원이었다. 그는 '청년의사' 창간 멤버들 위주로 우수한 의사들을 설득해 데리고 왔고. 첨단 의료장비도 과감히 들여놨다. 그러자 환자들이 제법 늘면서 병원은 회생하기 시작했다.

뇌혈관질환 진단과 방사선 시술, 뇌수술 등이 한곳에서 이뤄지는‘뇌혈관질환 하이브리드 센터’에 이왕준 이사장이 서 있다. 이런 시스템은 아시아에서는 처음이다. 뒤편의 사진은 미국의 한 사진작가가 자연 풍광을 담은‘파라다이스’라는 작품이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운명의 심폐소생술

호사다마(好事多魔), 병원이 활기를 띨 즈음 노사분규가 터졌다. 붉은 머리띠와 꽹과리 소리로 병원 로비는 아수라장이 됐다. 환자들이 빠져나가며 병원은 비어갔다. 젊은 시절 '노동자의 힘'을 외치던 그가 이제 노동자와 맞서 담판을 지어야 할 상황이 됐다.

그 와중에 병실 환자에게 심장마비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계단을 날아서 올라갔다. 전기충격을 주어도 심장마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기쇼크 최대 용량까지 올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잠시 심폐소생술을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허공을 봤다. 머릿속에는 의료사고 보상하라며 관을 메고 시위를 벌이는 환자 가족 모습과 파업 중인 근로자의 구호 소리가 겹치는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파업 때문에 멀쩡한 환자 죽였다는 소문이 금세 퍼질 터이다. "나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는가…." 마지막으로 그가 전기충격기를 잡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병실을 빠져나오는 그의 모습에서는 분신(焚身)이라도 할 것 같은 독기(毒氣)가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기(氣)싸움에서 그가 이기면서 노조는 협상 테이블에 나왔고, 파업은 끝났다. 당시 130여 병상이던 인천사랑병원은 현재 400병상에 연 매출 450억원대의 번듯한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병원을 고치는 의사가 되다

2009년,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경영난을 겪던 명지병원이 매물로 나온 것이다. 명색이 대학병원급이다 보니 대기업들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경영 부진을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자, 다들 입질만 하다 발길을 돌렸다. 한창 병원 경영에 자신감이 붙은 그가 달려들었다. 부채를 떠안고 병원을 인수하는 '이왕준 방식'이 동원됐다. 그는 "타이틀은 최연소 대학병원 의료원장이지만, 실체는 병원 경영에 실패하면 인천사랑병원마저 흔들릴 큰 모험이었다"고 했다.


경영난 대학병원 인수해 2년 새 22% 성장… 암센터·응급의료센터 지어

이주노동자 건강협회장, 로터리클럽 회원까지… "상하좌우로 오지랖 넓어"


병원 인수 후 처음 100일 동안 매일 아침 7시 회의를 열면서 1000여명의 의료진을 모두 면담했다. 문제점이 나오면, 개선책을 즉시 시행했다. '환자 제일주의'를 외치며 진료 시스템을 환자 중심으로 개편했다. 그러자 병원이 살아났다. 그가 인수하기 전인 2008년 721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876억원으로 뛰었다. 2년 새 22% 성장한 것이다. 그 수익금은 모두 암 센터와 응급의료센터를 새로 만드는 데 투입됐다. 올해는 충북 제천에 부도난 중소병원을 같은 방식으로 인수하여 200병상 규모의 '제천 명지병원'을 열었다. 이곳도 병원을 연 지 두 달 만에 병실이 꽉 차면서, 의료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지방 병원에서 가장 취약한 소아과에 전문의를 대거 배치하자, 어린이 환자와 그 부모 환자들이 병원에 몰려 온 것이다.


신종플루, 위기를 기회 삼다

새파랗게 젊은 의사가 대학병원 의료원장에 취임한 탓에 다들 그의 리더쉽에 의문을 가졌다. 중소병원 이사장이었던 그를 두고,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었다는 말도 나왔다. 그때 신종플루가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고열·기침 환자가 쏟아졌다. 하지만 병원들은 신종플루 진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 주저했다. 신종플루 전담병원으로 인식되면, 일반 환자 방문이 줄 수 있고, 기존의 암환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신종플루 전담진료 센터를 차리고, 24시간 진료를 시행했다. 모든 의료진이 마스크를 쓰고 나섰다. 그러자 신종플루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들은 잘 회복되어 나갔다. 이 일로 의대입학 순위 전체 41개 대학 중 37위였던 관동대 의대 명지병원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때부터 병원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이주 노동자부터 대기업 CEO까지

그는 한국이주노동자건강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외과 레지던트 시절, 성남 주민교회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진료소에 자원봉사를 나간 게 발단이었다. 가벼운 병에 약만 주고, 큰 병에는 "병원 가보세요!"라는 처방(?)에 무력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외국인 노동자 단체와 함께 '의료 공제회'를 조직했다. 일종의 의료비 상호 부조 형태다. 이주노동자가 병원 치료를 받으면, 병원은 진료비를 깎아주고, 공제회는 일정 액수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노동자가 돈을 내는 방식이다. 그는 이 운동에 동참할 병원을 물색하기 위해 전국 병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400개의 병원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2000년대 초 당시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의료공제회 가입증이 유일한 신분증이었다. 최근에 그는 네팔에 자선병원을 짓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저(低)개발 국가의 젊은 의사를 데려와 선진 의술을 가르치는 연수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가 참여하는 경영인 독서 포럼에는 대기업 CEO들이 즐비하다. 한양로터리클럽에 속해 있으면서 1950년대 자유당 시절 장관 했던 인사들과도 어울린다. 민노총 계열의 보건의료노조에서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병원장"이라는 평이 나온다. "좌·우, 상·하로 오지랖이 참 넓다"고 하자, 그는 "제 삶의 터가 대한민국"이라고 말했다.


환자를 위한 혁신과 헌신

좌우명을 묻자 그는 "일신우일신(一新又一新), 일보우일보(一步又一步)"라고 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한 걸음씩 계속 전진하자는 것이다. 그는 병원의 사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혁신은 창의적이지만 지속성이 떨어지고, 헌신은 숭고하지만 답답하고 갑갑할 때가 잦지요. 언뜻 이 둘은 대립적이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혁신과 헌신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고 봅니다. 혁신이 실현되려면 그 과정에 지난한 헌신이 있어야 하고, 헌신이 값진 것이 되려면 혁신이 있어야 하니까요."


명지병원 이왕준 이사장이 병원을 소개해주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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