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에게] '시일야방성대곡'할 정부의 섣부른 서훈 취소

조선일보
  • 정기정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입력 2011.06.02 23:33

    정기정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일인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로 겨레의 통분을 만방에 알린 위암 장지연 선생. 한국언론의 사표(師表), 명논설의 대명사로 존경받아온 그를 갑자기 친일인사로 몰아 1962년 정부가 서훈한 건국공로장을 정부 스스로 박탈키로 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얼마 전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4월 19일자 A34면)과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칼럼(대한언론 5월호)을 통해 서훈 박탈의 난센스를 통렬히 지적하고 보훈처의 심사위원 명단과 서훈 취소 자료의 공개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지금껏 꿀 먹은 벙어리다.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위암은 구한말 어지러운 시대를 한 자루 붓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한 교육가이자 개혁사상가였다. 그가 남긴 30여종의 저서, 45편의 논설, 200여편의 칼럼·시문 등은 학계·언론계에서 모두 수집·연구되어 전집과 논문 등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다. 학계에서는 자강론 등 위암의 민족사상체계에 더 관심을 보이지만, 그는 역시 언론인으로 분류됨이 마땅하다. 1898년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이듬해 시사총보 주필, 1901년 황성신문 주필로 취임한다.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 64일 만에 출옥했으나 강제퇴직당한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해조신문 주필로 활동하다 상하이로 건너가 괴한에게 피습당해 건강을 잃고 귀국한다. 1909년 새로 창간된 진주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왕성한 활동을 하다 황현 선생의 '절명시' 필화로 1910년 다시 사직당하고 언론계를 떠난다.

    1965년 신문편집인협회는 서재필·양기탁·최병우 선생과 함께 위암을 '유공언론인'으로 선정, 그 초상화를 신문회관에 현창했다. 또 1967년 전국 언론인들의 성금을 모아 경남 마산의 방치된 위암 묘소를 개수했다. 1989년에는 장지연기념사업회가 유명언론인 156인의 발기로 발족됐고 매년 위암언론상과 학술상을 시상해 오고 있으며, 1993년 문화부는 그해 11월의 문화인물로 장지연 선생을 선정,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유품 전시회가 개최된 바 있다.

    기록과 사실이 이런데 지엽말단적인 문제로 선생을 친일인사로 치부한 정부의 결정은 수긍할 수 없다. 위암 장지연 선생마저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6·25를 끝끝내 북침이라고 우기는 막무가내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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