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후레자식 놈이 우리 애를 때려?"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해 여름, 뒷집에 살던 김씨 아저씨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 말과 함께 억센 그분의 팔이 내 등을 몇 차례 내리치더니 뺨까지 때렸다. 어린 나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보니 벌써 52년 전의 일이다.
사정은 이랬다. 그분의 둘째 아들은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그날 나는 뒷방문 쪽으로 누워 있었고 그 애는 우리 집 뒷골목을 끼고 자기 집으로 가는 중에 엉성한 나무울타리 틈새로 나를 보고 놀려댔다. 동생뻘 되는 녀석이 놀리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화가 나서 그 녀석을 붙잡으러 뒤쫓아가는 길에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던 그 애 아버지를 맞닥뜨렸다. 그분은 아마 평소 나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던지 사건 전말도 따져보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나를 그렇게 다그쳤던 것이다. 왜 그분이 그런 막말을 나에게 했을까. 어린 나이에도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과연 그분이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내 아버지는 경상북도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3월 경주시 안강면 두류리 전투에서 순직했다. 6·25 전쟁 발발 한해 전인 그해엔 빨치산들의 활동이 심했다고 한다. 선친은 애국청년단 2명과 관내를 순찰하다 산속 초가집에 들러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인근 산속의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었던 그 집 주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20여명의 빨치산 부대원과 총격전을 벌이다 순직했다.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 위패를 모셨지만,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노천에서 화장을 해버려 유해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8개월 뒤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삼대독자이자 유복자이고 전몰군경 유자녀이다.
그 후 어머니도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셔서, 나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틈날 때마다 아버지 얘기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투 덕분에 인근에 주둔해 있던 군경이 합동으로 빨치산들을 모두 토벌할 수 있었고, 경주시 안강면민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울산 중앙시장에서 멸치 행상을 하며 손자를 키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손에 크면서 내가 겪은 수모가 한두 번이었겠는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고귀한 분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봤자, 돌아오는 건 결국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이제 내 나이도 환갑을 넘겼다. 40년 가까이 시청과 보훈단체에서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보훈처 산하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그리웠다. 1994년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백령도에 이르는 휴전선 155마일을 20일에 걸쳐 도보로 걸은 것도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휴전선 도보여행엔 동갑내기 아내(이순필)가 함께했다. 아내의 친오빠, 즉 손위 처남도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어 왼쪽 팔을 평생 사용하지 못하다가 10년 전 세상을 떴다. 보훈가족인 아내와 나는 그 후로 17년째 매년 휴전선과 38선을 따라 자동차와 자전거로 달리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작년 6월엔 마라톤으로 38선 인근을 완주하기도 했다. 6·25 전쟁 발발 50주년이던 지난 2000년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부터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LA까지 13개 주, 4000㎞의 북미대륙 38선을 자동차로 10일간 달리면서 전 세계에 한반도의 평화를 알리는 행사를 가졌다.
내가 걸어온 삶을 기록한 수기도 완성 단계에 있다.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남기고 싶어서이고, 또 전쟁의 참화와 가족의 소중함을 전후(戰後)세대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유월이 다가오면 나는 더욱 가슴앓이를 한다. 아버지가 목숨 바쳐 지킨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는데, 그 유가족들은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는 걸까. 정부는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내가 50여년 전 당한 그 일처럼 보훈가족 유자녀들에게 사회적인 편견이 없는 프로그램을 국민들에게 선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護國英靈)들에 대한 국가의 도리가 아닐까.
"아저씨, 저는 후레자식이 아닙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의 자식입니다."
52년 전 그때 외쳐보지 못한 항변을, 지금 다시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