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스포츠부 차장

지난해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올림픽 축구 한·중전(戰) 때였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중국 홈팬들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에 한국 기자들은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3대0으로 이긴 이 경기에서 중국 관중은 공을 한국 선수가 잡으면 갈채를, 중국 선수가 잡으면 야유를 보냈다. 한국 팀이 중국 팀의 공을 빼앗으면 "저것 보라"며 박수를 쏟아냈다.

이유는 하나였다. 중국 관중은 자기 나라 축구가 얼마나 썩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선수들이 조직폭력배와 결탁해 승부조작에 가담하고, 한통속으로 지갑을 불린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국(自國) 축구의 패배에 환호성으로 야유를 보낸 것이다. 관중은 이렇게 무섭다.

한국 프로축구에도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팬들도 프로축구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이제 축구팬들은 이전과 같은 눈으로 경기를 관전할 수 없게 됐다. 누군가 실수하면 "이거 뭐야, 혹시?" 하는 의문부터 품을 것이다. 자기가 연기(演技)를 보는 건지, 경기(競技)를 보는 건지 끊임없이 반문하며 90분을 보낼 것이다.

구속된 두 명의 프로축구 선수들은 도박 브로커로부터 각각 1억원, 1억2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선수 한 명이 승부조작 사례금으로 받는 돈은 2000만~3000만원 정도다. 단순 계산으로도 합계 2억2000만원의 돈은 선수 7~11명의 승부 조작 가담을 전제로 한다. 검찰수사의 가장 초기 단계에 공개된 사실만으로도 이렇다. 알려진 대로 승부조작이 최근 2~3년간 자행됐다면 도대체 몇 명이 연루됐을지 아찔할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엄중한 사태를 맞은 프로축구연맹이 프로축구 구단 단장들을 불러모아 대책이랍시고 '비리근절대책위원회'(가칭) 구성안 등을 내놓은 것을 보면, 과연 이들이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조직폭력배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선수, 이미 사실상의 브로커로 활동 중인 선수가 정신교육으로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프로축구연맹을 이끌 자격도 없다.

이번 승부조작 사태는 프로축구가 부정을 뿌리뽑고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이번에 어물쩍 넘어가면 두 번째 승부조작 사태가 반드시 생긴다. 그때는 어떤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팬들이 얼마나 차갑게 돌아설지 지금의 중국 축구가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로축구연맹은 26일 단장회의에서 K리그 중단을 검토했다가 없던 일로 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몽규 총재가 나서서 당장 리그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 정도 희생도 없는 자정(自淨) 노력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검찰 수사에 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현재 프로축구는 중병(重病) 환자이며, 환자가 스스로를 수술해서 살아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구단들은 승부조작 블랙 리스트를 모두 검찰에 제출하고, 암세포를 잘라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팬들에게 사죄하고 운동장을 찾아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고, 선택은 축구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