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국경은 일직선이다. 복잡한 종족과 역사를 가진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일직선인 이유는 간단하다. ‘침략자’들이 자신들의 편의대로 국경선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18세기 이전 ‘미지의 대륙’으로 불렸던 아프리카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탐내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 된 이후 원주민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조각조각 났다. 서로 다른 종족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데 엮였고, 같은 종족은 찢어졌다.
힘을 잃은 열강들이 대륙을 빠져나가자 ‘불편한 동거’를 하던 종족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렇게 “너와 나는 종(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이 학살되고 굶어 죽는 무자비한 종족 분쟁이 시작됐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아프리카의 눈물] 인포그래픽스 내용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인포그래픽스 바로가기
◆"여기는 수단, 지금 이곳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4년 수단에서 타전된 충격적인 사진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이 사진 속에는 죽어가는 소녀와 이를 바로 옆에서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국제사회는 그제야 수단에서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해 수단 남부 다르푸르지역에서 100만여명의 토착 흑인들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됐다.
살상의 시작은 1955년, 수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착 흑인들이 다르푸르 등 남부지역의 3개 주(州)를 장악했고 북부는 아랍계 세력이 지배했다. 오랜 내전은 1972년 끝나는 듯 했지만 1983년 재발했다. 계속되던 분쟁이 격화된 것은 2003년. 다르푸르 지역에 아랍계 인종의 이주개발이 본격화되자, 그동안의 정치·경제적 소외에 대한 불만까지 겹친 흑인 반군 조직들이 정부군에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아프리카판 킬링필드'로 불린 수단의 인종갈등은 2005년 정부군과 반군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부터 진정됐다. 그 사이 200만명의 희생자와 25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2011년 1월 수단은 남수단의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98.8%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 지역에 얽힌 인종·정치·경제문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제국주의는 르완다에 갈등의 씨를 낳았다
르완다를 종족 갈등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직접적 주범은 벨기에다. 벨기에는 이 지역의 소수민족이자 왕족이었던 투치족(10%)을 다수족인 후투족(89%)보다 우대해 서로에게 증오의 씨를 남겼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 혼란에 빠진 르완다의 정권을 다수족인 후투족이 잡았다. 후투족은 대학살을 자행했고 핍박당하던 투치족은 1990년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한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결성해 정부군을 공격했다.
두 민족간 유혈 충돌은 1993년 유엔의 중재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1994년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나빠졌다. 사건을 투치족 반군 소행으로 단정한 르완다 정부군과 후투족이 투치족 인종청소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50만~100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격에 나선 투치족은 1994년 7월 후투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2000년 르완다는 헌법과 행정구역 등을 개편하고 동아프리카 연합에 들어가는 등 국가정비에 나섰다. 인종청소의 아픔을 딛고 르완다는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물림 되는 라이베리아 착취의 역사…종족갈등과 맞물리다
19세기 초 해방된 미국 노예들은 선조의 고향이었던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1821년 아프리카 '메주라도 곶'에 이민지역이 건설됐고 1833년 자유 라이베리아 연방으로 불렸던 이 나라는 1847년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 됐다.
문제는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한 아프리코 라이베리안(미국 이주민)들이 특권층이 되고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발생했다. 1980년 원주민인 '크란족' 출신의 사무엘 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원수에 취임했다. 1989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크란족 정부군측은 주모자들의 출신 부족인 기오족과 미노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노족과 미노족은 아프리코 라이베리안과 함께 '라이베리아 애국 전선(NPFL)'을 결성했다. 1990년 도 대통령이 피살되고, 확대된 내전은 1995년 8월 평화협정체결로 마무리됐다.
1997년 NPFL 출신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에 올라 안정되는 듯했던 라이베리아는 대통령의 독재로 또다시 혼란에 휩싸였고 1999년 두 번째 내전이 발발했다. 2003년 미국 등의 군사개입으로 내전은 막을 내렸으나 14년에 걸친 내전으로 2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블랙호크 다운' 미국도 포기한 그곳, 소말리아
소말리아는 사실상 단일민족 국가다. 국민의 85% 이상이 소말리아족이다. 그런 소말리아가 내전국가가 된 것은 '범 소말리아 주의'를 외치며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과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소말리아는 소말리아족이 다수 거주하는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과는 소말리아의 참패. 이때부터 종족 내부의 6개 씨족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격으로 내전이 시작된 것은 1991년부터이다. 3대 씨족의 군벌이 일어나 정권쟁탈전을 벌였으며 소말리아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1992년 30여만명이 아사(餓死)하자 유엔 평화유지군과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이 파견됐지만 모두 "평화유지작전은 실패했다"며 철수했다. 미군의 소말리아 군사작전 실패를 그린 영화 '블랙호크 다운'은 1993년 수도 모가디슈에서 발생한 군벌과 미군 특수부대원들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소말리아 사태는 군벌세력들이 2000년 8월 지부티 합의에 따라 과도정부(TNG)를 구성해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2004년 10월 선거를 통해 압둘라히 유수프 아메드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상당수 군벌은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소말리아는 여전히 무정부상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