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상대에 北서적 쌓여있어… 변소에 버려"

조선일보
  • 전병근 기자
    입력 2011.05.25 03:10

    안병직 교수 '내가 체험한 60~70년대 좌익운동의 실체'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선집 등 김수행과 함께 해진 후 처분해… 당시 운동권 좌경화 우려스러웠다
    좌파, 민주화 기여한 부분 있지만 인민혁명 꿈 꿨던 과오 반성해야
    김수행 "책 갖다버린 기억 없다" 박성준 "말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서울대 상과대 조교였던 김수행(성공회대 석좌교수)이 큰일 났다며 연구실로 안내했다. 가보니 북한에서 내려온 서적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마르크스 선집'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쪽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중략) 저녁때를 기다려 책들을 변소(당시는 재래식)에 처넣고 말았다. 신영복을 찾아가 우회적으로 이야기하자 그는 왜 그런 일을 자기와 상의하느냐고 항의했다. 학교의 좌경화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고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1960~70년대 자신이 체험한 좌익 운동의 내막을 털어놨다. 일부 관련자들의 실명까지 들었다. 24일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시대정신)에 실린 증언 '민주화 운동과 민주주의: 좌익 운동을 중심으로'를 통해서다.

    안 교수는 당시 좌익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핵심은 북한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나 신(新)민주주의, 즉 비(非)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인 인민혁명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또 당시 정보·수사기관이 조사해 발표한 대부분의 보도 내용들이 기본적으로는 대개 사실이었다고 했다. 다만 개별 구성원에 대한 수사 결과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가혹한 형벌이나 상식 밖의 형집행도 있었다고 했다. 다음은 그의 증언 요약.

    4·19 이후 좌익 다시 고개들기 시작

    6·25 이후 반공주의가 지배했다가 4·19 학생의거가 터졌을 때 진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남로당 계열을 잇는 사회주의, 통일 운동 등도 '아, 이제 숨 쉴 때가 됐다'며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 첫 사례가 62년 1월 결성된 자생적 공산주의 정당인 인혁당(인민혁명당)이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 입학 후 박현채(전 조선대 교수·빨치산 출신)의 지도를 받으며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책을 탐독했다. 인혁당의 목적은 학생 운동을 지도하고 하부조직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북한과의 직접 접촉은 없었다. 인혁당에 가입한 일은 없지만 발각될 무렵 나는 후보위원 정도는 돼 있었을 것이다. 구속만 거의 50여명에 이르고 조직 강령까지 나왔는데 재판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소수였고 형량도 2·3년 이하에 불과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나 경찰 수사내용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이유로 뒤집힌 경우가 많았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1960~70년대 민주화 운동기 좌익 세력은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인민혁명을 추구했다”며“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발표된 대부분 보도 내용들이 기본적으로는 대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북한 지령받은 통혁당 사건

    1968년 적발된 통혁당(통일혁명당)은 주모자인 김종태가 월북해 북한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공산혁명 조직이었다. 서울대 상대에서 하부운동이 가장 활발했다. 그 중심에 '경제복지회'가 있었다.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이 박성준(성공회대 겸임교수)을 통해 '경제복지회'를 지도했는데 신영복은 통혁당 2인자인 김질락(김종태가 포섭)의 지도를 받았다. 통혁당 사건이 터진 후 나도 남산(중앙정보부 조사실)에 끌려갔는데 나의 관련 사실을 신영복이 김질락에게 소상히 보고했음을 알게 되었다. 통혁당 사건 처리 과정에서는 억울한 옥살이도 많았다.

    제2차 인혁당 사건은 무리수 많아

    74년 4월 당국은 인혁당이 재건을 거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지도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72년 10월 유신반대에 나서 1974년 결성된 전국 학생조직이었다. 인혁당의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민청학련 지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학생운동이 이미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 결과 사형 7명과 무기징역 7명 등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학생 리더에게도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등 중형이 내려졌지만 과중한 처벌이었고 형 집행과정도 문제가 많았다.

    혁명 꿈꾼 南民戰 '민주화 공로자'로

    1979년 10월 적발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은 처음부터 북한을 혁명기지로 보고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자금난 때문에 금은방 강도 행각을 벌일 정도였다. 핵심인 이재문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라는 신년하례 전문과 함께 혁명에 성공하면 중앙청에 내걸 전선기(戰線旗·인혁당 사형수 내의로 만들었다고 함)까지 만들어 보관했다. 그럼에도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공산혁명을 목표로 했던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했다.

    "좌익 계승 진보 세력 반성해야"

    안 교수는 "민주화운동기 좌익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공로도 인정되어야 하지만 인민민주주의운동의 과오도 반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거 좌익운동을 주로 계승한 오늘날 진보세력 중에는 이런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 귀결은 우파가 이끌어온 한국 근현대화의 공로를 폄하하면서 대한민국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거부하고 김일성 왕조 세습 독재를 용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진보진영이 한국현대사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과거 모습을 솔직하게 반성하고 한국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선진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인사들 반론

    김수행 교수는 "안 교수를 찾아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거나 책을 변소에 넣었다는 것은 기억에 없다"면서 "당시 레닌이 쓴 책이랑 북한의 소설책 몇 권이 이 방 저 방 돌아다닌 것은 기억난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른다. 일본에서 왔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그는 "안 교수가 당시 좌파 이론가로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라 학생운동 내부 사정을 잘 알 거란 점은 인정하지만 당시 대학가의 좌경화를 이야기한 대목은 과장이 있지 않나 싶다"고 했다. 박성준 교수는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만 말했다. 신영복 교수는 전화와 이메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답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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