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시장통으로 작업실 옮겼다… 동네상인도 VIP 됐다"

조선일보
  • 김미리 기자
    입력 2011.05.25 03:10

    앤디 워홀처럼? 예술 문턱 낮추기 나선 디자이너들

    1960년대 뉴욕 맨해튼에 있었던 앤디 워홀의 작업실‘팩토리’.
    팝아트의 대명사인 미국 작가 앤디 워홀은 1964년 뉴욕 맨해튼 이스트 47번가에 창고형 작업실을 열고 '팩토리(factory·공장)'란 이름을 붙였다. 알루미늄 포일과 은색 물감으로 도배된 공간에서 워홀은 공장에서 제품을 대량 생산하듯 실크 스크린 방식으로 작품을 '찍어냈다'. 이 '공장 작업실'은 "예술이란 고매하고 젠체하는 것"이라는 통념에 반기를 든 워홀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처럼 작가에게 작업실은 단순히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공간에 그치지 않고 작품 세계를 집약적으로 반영하는 공간이다. 이런 이유에서 최근 국내 작가들 중에도 도심 한복판을 벗어나 공장이나 시장 등 '예술'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곳에 둥지를 트는 사례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공장 지역인 영등포구 당산동 2가에 있는 산경물산 건물. 60여개의 크고 작은 공장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공장형 건물이다. 이곳에 지난달 디자이너 박진우씨가 운영하는 '지누박 디자인 연구소'가 입주했다. 팝 아티스트와 디자인을 넘나들며 이름을 알려온 박씨는 압구정동, 신사동 가로수길 등 서울에서도 최첨단을 걷는 지역에서 스튜디오를 해왔다. 그런 그가 먼지 풀풀 날리고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장으로 들어왔다. 우레탄 사출 공장과 이웃하고 있고, 옆 옆집은 염료 창고다. 조그만 의자 하나에 몇 천만원씩 거래될 정도로 국내외에서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는 신진 가구디자이너 배세화씨도 공장을 택한 경우다. 지난해 경기도 일산 성재공단의 한 공장 건물 안에 작업실을 만들어 하루 종일 나무와 씨름한다.

    공장을 작업공간으로 택한 작가들이 밀집한 대표적인 곳은 문래동 공단지역이다. 문래동 사거리 일대의 빈 공장 건물에서 60~70명의 아티스트가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디자이너 그룹 '노 네임 노 숍' 역시 3년 전 홍익대 앞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당산동의 공장 안에 있는 박진우씨의 작업실 '지누박 디자인 연구소'. 공구가 가득 있는 왼쪽 공간과 빨간 개폐식 문을 단 오른쪽 공간이 대비된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왜 하필 공장일까.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이유는 '머리만이 아니라 손까지 쓰는 장인(匠人)이 되고 싶어서'이다. 박진우씨는 "대개 컴퓨터 작업으로 디자인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생산은 못 하더라도 프로토타입(본보기)까지는 만들어 완성도를 높이려고 공장으로 왔다"고 했다. 주변에 제조 공장이 많아 작업에 드는 비용과 시간도 줄일 수 있다. 물론 싼 임대료도 중요한 요인이다. '노 네임 노 숍'의 디자이너 김건태씨는 "공장 건물 2·3층을 쓰는데 99㎡(30평) 정도에 월세가 60만원이다. 전에 있던 홍대 앞 스튜디오 월세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했다.

    각박한 도심 속 작업실에 비해 감성을 충전하기도 좋다. 배세화씨는 "도심 속에선 작업을 하려면 소음, 먼지 때문에 이웃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이곳은 그럴 염려가 없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개 196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어서 시간이 누적된 빈티지 공간으로서의 매력이 큰 점도 작가들을 불어 모으는 요소다.

    공장뿐 아니라 시끌벅적한 시장통도 작가들의 무대가 되고 있다. 지난해 말 골동품 시장으로 유명한 서울 중구 황학동의 도깨비 시장 안에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열었다. 솔로몬빌딩이라는 이름의 상가 안 곳곳에 디자이너와 작가 8명이 입주해 '솔로몬 아티스트 레지던시'라는 이름을 걸었다. 레지던시 입주 작가 겸 큐레이터인 석혜원씨는 "예술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누리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누구든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장소로 시장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청담동에선 예술의 문턱을 아무리 낮추려 해도 쉽지 않았는데 시장에선 동네 상인도 우리의 VIP"라고 했다.

    서울 당산동 공장 안에 있는 박진우씨의 작업실 '지누박 디자인 연구소'의 모습. 공구가 있는 작업실과 빨간 지붕의 사무실이 공존한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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