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씨네 칵테일] ‘사랑을 카피하다’ 속 복제품의 ‘오리지널리티’

입력 2011.05.12 10:49 | 수정 2011.05.12 10:50

부부 역할 놀이 하던 중년 남녀, 점차 진짜 부부의 갈등 속으로 빠져
원본과 복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무는 거장의 사랑·인생 이야기

출처=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처음으로 이란 밖으로 나가서 찍은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 장면

일본에서 수집용으로 팔리는 물건들 중에는 2차대전 때 총기들을 발사 불능 상태로 가공한 ‘무가동(無稼動)실총’도 있고,  이런 실총을 정교하게 복제한 ‘모델 건’도 있습니다. 흥미있는 건 그 가격입니다. 독일군 기관단총 MP-40의 무가동 실총은 10만~30만 엔(약 130만~390만원)정도인데, 그 복제품 중에는 무려 100만 엔(130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일본 MGC사에서 1968년에 발매한 버전인데, 복제품이 오리지널보다 더 비싼 셈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철제로 만들어 판매하다가 이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경찰에 의해 발매중지가 되는 바람에 ‘희소성’과 ‘스토리'라는, 가치 상승 요인이 한꺼번에 생긴 것입니다.

영화 칼럼에서 느닷없이 골동품 모형총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원제 Copie Conforme)'가 던진 화두 때문입니다. 영화는 ‘원본의 가치와 복제품의 가치는 어떻게 다른가’와 같은 물음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출처=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처음으로 이란 밖으로 나가서 찍은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 장면

‘공인된 복제품(Certified Copy)’이란 책을 낸 영국 작가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가 출간 기념 강연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을 찾아갑니다. ‘질좋은 복제품이란 오리지널 만큼 가치 있는게 아닐까'하는 테마를 풀어낸 강연장에서 제임스는 아름답고 민감한 프랑스 여성(줄리엣 비노쉬)을 만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며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그녀는, 제임스에게 투스카니 지방 투어를 시켜주겠다고 자청합니다. 중년 남녀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시골 마을을 한나절간 함께 돌아다니며, 잊지못할 대화를 나누고 특별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남녀의  짧은 투어에서도 ‘진짜의 가치와 짝퉁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제임스가 모조 골동품을 진품으로 착각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어느 박물관에선 너무나 잘 그려진 복제 그림이 진품 못잖게 귀중하게 보존돼 있는 것도 봅니다. 제임스가 “로마시대 원작 그림도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베낀 것 아니냐"고 말하는 대목에선 ‘도대체 오리지널이란 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왜 풍경화 처럼 아름다운 이탈리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멋진 중년 남녀를 여행하게 만들어 놓고는 하필이면 ‘진짜와 복제'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만든 걸까요. 그 궁금증은 남녀가 투어 도중 본의 아니게 부부 행세를 하는 대목에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카페 여주인으로부터 부부로 오인받은 두 사람은 내친 김에 15년차 부부인 척 행동하게 되는데,  이게 ‘진짜 부부와 짝퉁 부부'혹은 ’진짜 사랑과 짝퉁 사랑'이란 테마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엔 다소 장난스럽게 시작한 부부 행세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진지해집니다. 둘은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선배 부부'로서 축하와 충고의 말도 해 줍니다. 사랑에 관한 생각을 서로 나누던 '15년차 부부'는 점점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듭니다. 그리고 날카롭게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결혼기념일에 2주만에 귀가한 남편이 바로 잠들었던 일을 둘러싸고 “남편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랬겠느냐"고 '고전적'인 부부싸움까지 벌이기 시작합니다.

출처=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처음으로 이란 밖으로 나가서 찍은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 장면

여자가 말다툼 끝에 눈물까지 흘리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남남인 두 남녀가 한번 부부인척 해보는 게 아니라 원래 부부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어느 모습이 오리지널이고 어느 모습이 가짜인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부부 사이를 복제한 ’짝퉁 부부'의 역할 놀이에서도  ‘진짜’ 감정이 부딪칠 수 있다는 건, ‘복제’에도 오리지널리티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그림이 곁들여진 소설을 닯았습니다.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드라마틱한 영화적 사건 대신 남녀가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섞어쓰며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와, 그들이 순례자처럼 찾는 투스카니의 풍광들이 영화를 가득 채웁니다.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사랑과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절실한 테마인지를 아는 관객이라면 묘한 긴장감으로 남녀의 대화가 또 어디로 굴러갈지 지켜보게 됩니다. 이 영화로 작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엣 비노쉬과 영국 오페라 배우 출신인 남주인공 윌리엄 쉬멜의 호흡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복잡한 감정의 기복을 ‘진짜’처럼 절묘하게 표현해냅니다.

영화는 무엇을 명쾌하게 결론내리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남녀 사이에 진심을 서로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서 넘어야할 벽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기도 하고, 원본과 복제에 관한 우리들의 획일적인 결론에도 물음표를 찍습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등으로 이란 영화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보여줬던 거장 키아로스타미의 섬세한 연출력과 삶을 보는 시선이 영화 곳곳에 숨쉽니다. 영화마다 길과 나무들을 담아온 감독은 이 작품에서도 시간이 멎은 듯한 중세도시 루치냐노의 골목길과 가로수들의 아름다움을 필름에 고스란히 ‘카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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