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업 관계자들에게 세계 와인업계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 사건 하나를 꼽아보라면 십중팔구는 1976년의 '파리의 심판'을 든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와인을 물리친 일이다. 이 행사를 연 사람은 영국사람 스티븐 스퍼리어(Spurrier·70)씨. 그가 와인학교 '아카데미 듀 뱅' 개교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4일 서울에 왔다. 지금은 영국 와인잡지 디캔터(Decanter) 등에서 와인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가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파리의 심판에 대해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행사의 주목적은 캘리포니아 와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알려진 대로 엄청났다. 그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그 역사적 사건으로 나도 이름을 날리게 됐고 영원히 기억되게 됐다."

―몬다비 등 당시 이미 이름이 알려진 미국 와인은 왜 포함시키지 않았나.

"대량 생산하는 유명 와인보다 작지만 공들여 만든 와인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리고 싶었다."

―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었나.

"나파(캘리포니아의 주요 와인 생산지)가 어딘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심사단에서 미국 와인을 마셔본 건 오베르 드 빌렌이 유일했다. 미국 와인이라고 하면 편견을 갖고 실제보다 낮게 평가할까 봐 걱정돼 라벨을 가렸다."

―지금 '파리의 심판'을 한다면 어떤 나라나 지역 와인으로 하겠는가.

"남미다. 현재 가장 흥미로운 지역이다. 남미에서도 아르헨티나 와인이다. 칠레보다 아직은 떨어지지만 와인 품질이 놀랍게 뛰어나다. 와인 생산자들의 열정도 대단하다."

―양념을 많이 사용해 자극적이고 채소가 주재료인 한식과 어울리는 와인은.

"자극적이고 맛이 강하다면 와인도 강해서 음식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 론(Rhone)이나 랑그도크(Languedoc),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나 시칠리아(Sicilia)산처럼 강건한(robust) 와인이 어울릴 듯하다. 프랑스 루아르(Loire)처럼 섬세한 와인은 좋은 궁합이 아니다."

―와인을 즐기는 비법은.

"집중하며 마시는 것, 그뿐이다. 이른바 절대 미각이나 절대 후각을 타고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후각과 미각을 타고난다. 얼마나 집중해 마시느냐, 이를 통해 얼마나 깊고 넓은 '와인 기억 은행(wine memory bank)'을 개발하느냐가 차이를 가져온다."

―미국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백만불짜리 코'를 가졌고, 보험에 가입까지 했다는데.

"그라고 남다른 후각과 미각을 가진 건 아니다. 다만, 환상적인 와인 기억력을 가졌을 뿐이다."

―와인 기억 은행이 없고 기억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일반 와인 소비자는 어떻게 좋은 와인을 고를 수 있나.

"간단하다. 믿을 만한 와인상인을 찾아라. 당신과 취향이 같은 와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와인을 추천받은 다음 집중해서 많이 마시다 보면 자신만의 와인 판단력이 길러질 것이다."

―비싼 와인이 좋은 와인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와인은 비싼 와인이다. 하지만 가격 대비 우수한 와인이 무엇인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당신이 규정하는 '좋은 와인'은.

"프루티(fruity·맛과 향이 풍부한 와인을 지칭하는 표현)함과 산도(酸度·acidity)가 조화를 이룬 와인이다. 프루티함과 산도는 각각 와인의 '음(陰)'과 '양(陽)', 즉 기본이다. 더 나은 와인은 여기에 개성(personality)이 더해진 것이다. 다른 와인과 차별화하는 독창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같은 소비뇽 블랑 포도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이라도 뉴질랜드처럼 품종의 특징을 드러낼 수도 있고, 프랑스 상세르(Sancerres)처럼 토양, 즉 테루아(terroir)를 잘 표현하는 것도 개성이다. 우수한 와인일수록 개성이 두드러지지만 그래서 더욱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세계와인 시장 판도 바꾼 1976년 '파리의 심판']
라벨 가리고 시음회했더니… 무명의 美와인, 프랑스 누르다

'파리의 심판'은 스티븐 스퍼리어씨가 1976년 5월 파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과 프랑스 와인을 대상으로 연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라벨을 가린 채 하는 시음회) 행사이다.

1976년‘파리의 심판’행사 당시 모습. 스퍼리어씨의 동업자 파트리샤 갤러거, 스퍼리어씨, 와인전문지‘레뷔 뒤 뱅 드 프랑스’편집인 오데트 칸.(왼쪽부터)

시음 대상으로 나온 프랑스 와인은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바타르 몽라셰 등 최고급 일색이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 로마네콩티 공동소유주 겸 관리자 오베르 드 빌렌, 유서 깊은 파리 레스토랑 타유방의 소믈리에 장 클로드 브리나 등 프랑스의 '와인 고수' 9명이 심사를 맡았다. 캘리포니아 와인측으로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캘리포니아산이 레드와 화이트와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와인의 세계 시장 공략이 시작됐다.

'파리의 심판'은 미 타임지의 조지 테이버가 행사를 취재하고 쓴 기사의 제목. 대부분 언론이 현장에 오지 않았지만 테이버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 취재에 나섰다가 세계적인 특종을 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