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저축은행에서 나온 폭발물

조선일보
  • 송희영 논설주간
    입력 2011.05.06 23:19

    저축은행 부실 출발점은 부동산 경기 침체인데 혁신도시·뉴타운 운운하며 부동산 띄운 정치가 씨앗 뿌려
    정체모를 펀드·架空회사가 대형사고 불러올 시한폭탄

    송희영 논설주간
    저축은행에 분노의 총알이 쏟아진다. 예금자 돈을 자기 돈인 듯 탕진한 대주주를 욕하고, 그들과 한통속인 금융감독원을 성토한다. 저축은행 8곳에 5000만원 넘게 예금했다가 다 찾지 못할 피해자가 2만7000여명이다. 직격탄을 맞은 숫자만 조그만 도시 규모다. 이자 몇 푼 더 받으려고 저축은행에 돈을 맡겨두고 뺄까 말까 망설이는 숫자를 헤아려 보면 전 국민이 피해자다.

    그러나 흥분하고만 있기에는 불길한 조짐이 진하게 다가온다. 저축은행 사태의 꼬락서니가 경기 불황이 아니면 금융위기로 이어질지 모를 불안 증상을 보이고 있다.

    저축은행이 무더기 도산한 출발점은 부동산 경기 침체다. 부동산 불황(不況)이 길어져 거대 개발 사업에 대출해준 저축은행들이 큰돈을 물리고 말았다. 부동산을 믿다가 나라가 멍들었던 일은 잦았다. 1990년대 일본에서 그랬고, 3년 전 미국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번 부동산 거품 붕괴도 저축은행 몇 개를 집어삼키는 데 그치지 않을 듯하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저축은행 대주주와 경영진이 죄인이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권력자와 정치인을 믿고 따라갔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은 기업도시·혁신도시로 바람을 잡았고,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뉴타운·보금자리 주택·4대강 개발로 부동산을 띄웠다. 시장·군수들은 너도나도 재개발 공약을 내놨다.

    정치가 부동산을 띄우겠다고 앞장설 때 돈 장수들이 부동산 대출을 거부하기란 현찰 박스를 팽개치는 것처럼 힘들다. 미국도 클린턴·부시 대통령이 대(代)를 이어 모든 가정에 집 한 채씩 나눠줄 듯한 주택정책을 추진했던 것이 그만 금융위기를 조장하고 말았다. 정치가 뿌린 부동산 버블의 씨앗은 언제나 금융회사를 통해 폭발한다.

    저축은행 사태가 찜찜한 이유는 더 있다. 그 안에 숨겨진 '폭발물'을 다 잡아낼 수 없다. 이번에 여러 군데서 이중장부가 나왔다. 특수목적회사(SPC)를 120개나 몰래 경영하면서 예금자 돈을 빼돌린 사례도 적발됐다. 전형적인 오너 비리(非理)로 보인다.

    하지만 8개 저축은행만 이런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저축은행, 다른 금융회사에도 시한폭탄성 부실투자가 적지 않다. 지난 몇 년 동안 금융권에서는 사모펀드(PEF) 투자와 무슨 '특수 목적'에 쓰려고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SPC 설립 붐이 불었다. 앞서가는 첨단 금융기법처럼 보이지만, 잘 되면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씩 이익을 남기고 잘못되면 그만큼 손실을 보는 도박성 투자다. PEF나 SPC가 인기 있는 것은 외부 감시를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장부만 봐서는 알짜 투자를 했는지, 엉터리 투자를 했는지 알기 어렵게 월스트리트 인간들이 개발한 묘수다.

    감독 당국의 감시카메라를 피해 음지(陰地)에서 큰돈을 굴리는 경쟁이 국내 금융권에서 성행하고 있다. 서울 증권시장은 파생금융상품 거래에서 2년 연속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파생상품의 본가(本家)라는 시카고·뉴욕 시장까지 누르고 작년에 37억여건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국 금융이 부쩍 성장했다고 뿌듯해 할 만한 징표는 결코 되지 못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펀드와 가공(架空)회사들이 그만큼 번성하고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부산저축은행이 특수목적회사를 120개나 따로 굴렸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요즘에는 재벌 회사들까지 이런 음험한 투자에 뛰어들었다. 이익 잉여금을 주체하지 못해 조세회피지역에 수백개의 가공회사(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재벌 그룹도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이 장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PEF와 SPC를 수백개씩 굴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폭발 규모가 컸던 이유는 매설된 지뢰가 그토록 많은지 알지 못했던 데다, 부동산 경기가 무너지자 이곳저곳에서 한꺼번에 터졌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사태는 여러모로 대형 폭발로 이어질 잠재력을 갖추었다. 부동산은 깨어날 징조가 없고, 20년 전 일본처럼 건설회사들이 속속 무너지고 있다. 때마침 경기 사이클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 정권은 대기업을 압박해 투자의욕이 추락하고 있다.R>
    그렇지 않아도 힘이 빠지는 정권 말기다. 한국의 외환위기나 미국의 금융위기도 정권 말기에 정책 당국이 갈팡질팡할 때 발생했다. 휘발유 값 소동에서 청와대와 경제팀은 체통을 잃었고, 저축은행 사태에서는 위엄을 잃었다.

    경제 흐름에 나쁜 신호등 여러개가 동시에 깜박거린다. 저축은행 사태가 저축은행 울타리 안에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