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예고편 전쟁] '낚였다'고 욕하지 마세요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1.05.05 03:22 | 수정 2011.05.05 06:18

    제작자가 말하는 '영화 예고편의 세계'
    연애 시작하는 남녀가 밀고 당기듯, 좋은 걸 다 보여주진 말아야…
    재미없는 영화 예고편 만들기? 우리도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재미없는 영화는 많지만, 재미없는 영화 예고편은 없다. 2시간 가까운 영화를 15~30초에 녹여 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예고편 제작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치열한 머리싸움"이다.

    조선일보와 영화 예매 사이트 맥스무비가 지난달 실시한 '2011 한국 영화 지표 조사'에서 영화 선택 기준 가운데 1위가 '극장 예고편'(48.7%)이었다. 이처럼 영화 산업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예고편은 누가, 어떤 묘책(妙策)을 써서 만드는 것일까.

    좋은 걸 다 보여주진 말 것

    현재 국내에선 10여개의 전문제작사가 연간 130여편의 영화 예고편을 만들어내고 있다. TV용이 15초, 티저(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알려주지 않아 궁금증을 유발하는 예고)는 30초, 극장용 예고편은 2분 이내다. 대부분 한국 영화 예고편이고 외화(外畵) 예고편은 외국 제작사들이 직접 만들어 국내에 배포하고 있다.

    예고편 제작의 기본 방법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키 비주얼(key visual)'을 잘라 재편집하는 것이다. '타짜' '아저씨' 등의 예고편을 만든 제작사 '하하하'의 김기훈(34) 감독은 "예고편 만들기는 요리와 같다"고 했다. "영화라는 원재료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들을 떼어낸 다음 편집과 음향, 음악, 자막과 같은 양념을 함께 넣어 예고편을 만든다"는 설명이다.

    키 비주얼을 뽑아낼 때는 주인공의 특징을 먼저 염두에 둬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관객들에게 가장 빨리 영화를 각인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원빈이 주연한 '아저씨'는 액션물인데도 '꽃미남 배우 원빈'의 인물을 부각시켜 여자 관객들의 감성에 호소해 성공한 대표적 경우다. 영화의 기둥인 액션 장면은 많이 보여주지 않고 대신 영화에는 들어 있지도 않았던 서정적인 노래를 따로 만들어 영화 예고편에 입혔다. 예고편의 반응이 좋자 이 노래는 결국 영화에까지 삽입됐다.

    "예고편 성공의 관건은 키 비주얼들의 공개 수위"라고 한다. '하하하'의 최승원 감독은 "막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남녀가 밀고 당기기를 하는 걸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유명 여배우의 노출 장면이 영화에 들어 있는 경우에는 옷을 벗는 장면부터 가슴이 노출되기 직전까지만 예고편에 넣는다. 새침하고 도도하게 덜 보여주거나, 반대로 제발 봐달라고 애걸복걸하듯 많이 보여주는 식으로 예고편끼리도 차이가 많이 난다"는 얘기다.

    영화 예고편 제작사‘하하하’의 최승원 감독(왼쪽)과 신의철 조감독(가운데), 김기훈 감독이 4일 서울 강남 작업실에서 영화‘써니’예고편을 보며 얘기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재미없는 영화의 재미있는 예고편 만들기

    예고편 제작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뭘까. 한 감독은 "예고편 시사회에서 영화감독과 제작자 등에게 30초짜리를 틀어줬는데 '왜 이렇게 길어'라는 평가가 나올 때 가슴에 못이 박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면 예고편 제작자들에게 가장 큰 고역은? 당연히 "재미없는 영화의 예고편을 만드는 일"이다. 한 중견 예고편 감독은 "예고편을 만들려면 편집도 제대로 안 된 세 시간 짜리 영화를 음악도 없이 최소 다섯 번은 봐야 하는데 재미없는 영화를 여러 번 봐야 할 때는 정말 미칠 것 같다"고 했다.

    예고편 제작자들이 '재미없는 영화의 재미있는 예고편 만들기'에 즐겨 쓰는 기법 중 대표적인 것은 "영화에 없는 장면을 예고편용만으로 따로 만드는 것"이다. 한 감독은 "스토리는 재미없지만 배우들이 외모가 뛰어날 경우 이들을 한군데에 모아 영화에는 없는 장면을 찍어 예고편에만 넣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했다.

    섹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남녀 배우들의 노출 장면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도 자주 동원된다. 한 예고편 제작자는 "스토리에 자신 있는 영화들은 섹스신의 예고편 삽입을 가급적 절제하는 반면, 재미없는 영화들은 노출 장면의 거의 전부를 예고편에 넣어 노골적으로 관객들을 유인한다"고 했다.

    이처럼 재미없는 영화도 예고편은 재밌게 만들다 보니 관객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영화게시판에 '이 영화는 예고편이 전부다' '예고편에 낚였다(속았다)'는 식의 관람 후기는 기본이고 심하면 '예고편 만든 사람 가만두지 않겠다'는 험악한 글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리틀 머큐리사(社) 정광진 실장은 "관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영화 개봉 첫주에 흥행 판가름이 나기 때문에 우리로선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예고편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기훈 감독은 "예고편에 끌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실망하고 분노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를 느낀다"고 했다. "예고편 제작자로서 죄책감은 들지만 '내가 (예고편은) 잘 만들었나 보다'는 생각에 혼자 씨익 웃는다"는 것이다.
    '하하하필름프로덕션' 최승원감독과 김기훈 감독이 논현동 작업실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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