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버렸다, 자부심을 얻었다

입력 2011.04.29 03:26 | 수정 2011.04.29 03:29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무상기증
500년 세월 고스란히… 시가 80억, 소작인에게도 몸 낮춘 명문가
"경주에 최부잣집이 있다면 군포엔 정부잣집 있어"

기증의 주역 정용수씨.

'흉년에는 이웃에 쌀을 나눠줘라' '소작인에게 몸을 낮춰야 한다'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말고 늘 덕을 베풀어라'….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풍을 이어받은 명문가의 후손들이 500년 세월을 간직한 종택(宗宅)을 사회에 내놓는다. 동래정씨 동래군파 16대 종손인 정운석(98)씨와 자녀 9남매가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있는 종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과 인근 대지·전답 1만8176㎡(5500여평)를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에 무상기증한다고 28일 국민신탁이 밝혔다. 공시지가는 35억2000만원, 시가로는 80억원이 넘는다.

"솔직히 아까운 생각이 잠깐 들었다"

"욕심을 버린 게 아니라 욕심을 부린 겁니다."

햇살 가득한 고택 마당에서 한 신사가 사람 좋게 웃었다. 9남매 중 셋째 아들인 정용수(63)씨. 이번 기증의 주역이다.

군포 수리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종택의 역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광보(1457~1524)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행랑채 등 5동 60칸이 남아 있다. 안채는 정조 때인 1783년, 사랑채는 고종 때인 1877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살림집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고택에 대해 이상해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맞배지붕의 아름다운 외관을 갖추고 있고,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선비들의 사랑을 받는 풍수지리상 훌륭한 입지"라고 했다.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있는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조선 후기 살림집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군포=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정운석씨는 일찌감치 자식들에게 집과 농지의 소유권을 넘겨줬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남을 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형제들은 6~7년 전부터 '우리 집을 공적 공간으로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용수씨가 넌지시 종손인 큰형과 둘째형에게 묻자 형들이 선뜻 동의한 것. 형제들은 소유권을 포기함으로써 종택을 영원히 지킬 수 있게 된 기쁨이 더 크다고 했다.

용수씨는 "대대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사는 게 더 큰 것을 얻는 것"이라며 "몇 대를 걸쳐 내려가면서 정신이 더 살찌지 않겠느냐"고 했다. "기증을 결심하고 국민신탁에서 시가를 계산한 것을 보니 솔직히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기도 했다"는 정씨 형제가 유일하게 부탁하는 것은 "관리인으로 계속 농사지으며 살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

동래정씨는 조선시대에 정승만 17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정광보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뛰어난 서예가였던 동래군 정난종(1433~1489)의 큰아들. 정광보의 동생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1462~1538)이다. 정광보·광필과 그 자손들의 묘도 종택 뒷산에 모셔져 있다. 20세기의 대표적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 선생도 이 집안 사람이다. 위당의 아들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해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매년 시제(時祭·음력 10월에 5대조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 때마다 모두 종택에 모인다고 했다.

특히 정광필에 대한 미담이 지금도 많이 전한다. 정광필이 이조참의로 있다가 충청도 아산으로 유배갔을 때는 새벽마다 싸리비를 들고 삼문(관청 앞에 세 개의 문) 앞길을 쓸었다. 정3품 당상관이 천한 종들이 하는 일을 한다며 주변에서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집 하천(下賤)들을 도량으로 대해 존경을 받았고 그것이 동래정씨 집안의 너그러운 가풍으로 대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등의 저서를 낸 조용헌씨는 "고택이 남아 있다는 게 바로 명문가라는 증거"라며 "조선시대에 훌륭한 인물이 나왔고, 후손들이 그걸 정신적 자산으로 해서 잘 유지한 것"이라고 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이 종택과 농지로 친환경 농촌공동체를 조성해 군포의 브랜드로 활용할 계획이다. 김종규 이사장은 "경주에 최부잣집이 있다면 군포엔 정부잣집이 있는 것"이라며 "한국적 토양에 맞는 내셔널트러스트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5월 3일 종택에서 정운석씨와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신탁 체결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 문화유산국민신탁(www.ntch.kr)

문화유산을 신탁 받거나 국민의 헌금·기부를 바탕으로 매입해 보존하는 운동을 벌이는 특수법인이다.

1895년 영국에서 문화·자연유산의 보존을 위해 시민들이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모델로 삼아 2007년 3월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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