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금융감독원장들의 '미끈한 혀'

조선일보
  • 송희영 논설주간
    입력 2011.04.22 23:19

    리먼 사태·日 원전사고는 탐욕스러운 경영진과 무능한 정부가 만든 재앙
    부동산 투자로 대박 노린 우리 저축은행도 판박이… 뒤처리는 결국 납세자 몫

    송희영 논설주간
    지난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도산하고 나흘 뒤 백악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대통령, 지금 발생한 것은 금융공황입니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잘라 말했다. "대공황(1929년) 이래 최악의 위기인가요." 부시 대통령의 이 질문에는 폴슨 재무부장관이 대답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폴슨의 회고록에 나오는 장면이다. 자극적인 발언이 이어진다. GE·골드만삭스·씨티은행 등 미국의 상징 기업들이 무너지는 판이었다. 대통령부터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충격에 겁을 먹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예상 밖(想定外)'이다. 38.9m 높이의 쓰나미를 미처 계산해보지 못했고, 진도 9짜리 지진을 상정해보지 못했다. 비상용 발전기가 끊겨 원자로가 폭발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는 말이다.

    미국의 금융위기와 일본의 원전 사고는 많은 것이 닮았다. '설마 그런 일이…'라던 일은 발생하고 말았고, 그 후엔 모두가 '예상 못한 일'이라는 반응이다. 사고친 회사나 수습을 맡은 정부는 '처음 겪는 예외적인 사태'라는 방파제 뒤로 도망치며 책임회피에 애쓴다.

    후쿠시마 원전을 지을 때는 수백년간 지진이 없던 곳을 용케 찾아냈다고 했었다. 안전에 관한 한 어떤 건축물보다 믿을 만하다는 큰소리도 빠뜨리지 않았다. '시벨트'니 '베크렐'이니 과학자들조차 좀체 쓰지 않는 측정단위까지 들먹이며 '위험도 제로(0)'인 듯 설명했다.

    리스크가 낮기로는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대출)을 묶어 만든 금융상품만한 것도 드물었다. 재앙이 터지기 전에는 그랬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최상 등급을 매기는 데 A 알파벳 3개로는 아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은 속았다. 최고 과학자들이 만든 원전에 속았고, 최고 수재들이 만든 금융상품에 속았다. 머리 좋은 인간들이 위험도를 낮출 만큼 낮춰서 만들었다고 뽐내던 발명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두 재앙의 공통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재들이 불러온 재앙의 뒤처리는 고스란히 평범한 납세자들에게 넘겨졌다. 미국은 구제금융 7000억달러 외에 중앙은행을 통해 30개월간 돈을 찍어냈다. 일본도 세금과 전기요금을 올려서 이번 사태를 뒷수습할 모양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의 태도도 똑같다. 미리 재앙에 대비한 흔적은 커녕 빈말로라도 "큰 일이 터질지 모른다"고 경고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 사후에는 허둥대다 일단 빚을 내서 쓰고 보자는 수습책도 두 나라가 똑같다. 정부는 무능하고 정치권은 무책임하다는 사실이 재앙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월급쟁이들은 분통이 터진다. 리먼이나 도쿄전력이 큰 이익을 냈다고 언제 내 주머니 안에 용돈을 찔러준 적이 있었던가. 이익금으로 주주들이 배당을 늘리고 경영진이 연봉과 성과급을 톡톡히 챙겨갔다는 소식만 들었던 터다. 그런 그들이 내팽개친 쓰레기는 아무 죄 없는 납세자들에게 넘겨졌다. 어제의 이익금은 자기들 몫이고, 오늘의 쓰레기 잔해(殘骸)는 내가 치워야 한다니.

    무고한 사람들에게 덤터기 씌우는 못된 버릇은 일본·미국만의 구경거리는 아니다. 한국의 부실저축은행 사태를 보자. 경영진은 부동산 투자로 대박을 노리다가 덜컥 넘어졌다. 정부는 4조~5조원을 집어넣어 그들이 팽개친 부실쓰레기를 청소하겠다고 한다. 3년새 조(兆)단위 지원이 벌써 네 번째다. 모두 막판에는 세금으로 막아야 할 돈이다.

    다급하다 보니 은행 예금자들이 맡겨놓은 보험금까지 갖다 쓰겠다고 한다. 은행 예금자들이 낮은 금리를 감수하며 모아놓은 비상금을 엉뚱하게 저축은행을 구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그 비상금을 관리하는 예금보험공사는 앞으로 '예금자 보호' 팻말을 버리고 '예금자 약탈(掠奪) 공사'로 개명해야 할 것이다.

    이틀 전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도 역대 금융감독원장들 중 누구도 책임지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혀를 교묘하게 굴리며 빠져나갔다. 신용금고에 '은행'이라는 고상한 간판을 달아주었던 사람들이나 저축은행도 은행이니 부동산에 펑펑 대출해주라고 물길을 터줬던 사람들이나 그때는 "저축은행은 믿을 만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었다. 이제 와서는 입을 맞춘 듯 "부동산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예상 밖의 사태'란 방패 뒤에 몸을 숨긴다.

    탐욕스러운 경영진, 무책임한 정부 당국자, 리스크가 낮다던 천재들을 믿고 따라다녔던 납세자들은 그들 뒷자락을 쫓아가며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 말끔히 청소가 끝날 쯤이면 또 다른 탐욕과 무능, 천재성이 선량한 국민을 속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느 나라나 속이는 쪽과 속는 쪽은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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