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기술자가 '1분 時差' 줄이려다 대참사

입력 2011.04.22 03:00 | 수정 2011.04.22 10:28

25년 맞아 사고 돌아보니…
비상발전기 가동 실험하려고 전원 끊으려다 원자로 폭발
소련, 책임 물어 10년형 선고… 전문가 "시설만큼 인간 중요해"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사고 수습이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역대 최악의 원전 참사로 불리는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고가 다음 주로 25주년을 맞는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현재 우크라이나) 원자로 4호기 폭발로 방사성 물질이 대량 누출돼 구소련 일대는 물론 유럽 전체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자연재해(지진과 쓰나미)로 촉발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달리 체르노빌은 사실상 인재(人災)였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세계 원자력 산업에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무리한 실험이 초래한 대참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4월 26일 오전 1시 23분에 발생했다. 사고 전날인 25일 오전부터 체르노빌 원전측은 원자로 4호기의 정기 점검을 위해 잠시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었다. 4호기에는 원자로의 가동 중단 시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장치들을 돌릴 수 있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 3기(基)가 있었다. 이 발전기들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기까지 약 1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1분의 시차(時差)를 보완하기 위해 체르노빌 원전 차석 엔지니어였던 아나톨리 댜틀로프(당시 55세)는 주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자로 터빈의 관성에 의한 에너지가 원자로 냉각펌프 등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주 전원이 끊어질 때까지 전원의 출력을 낮춰보기로 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당시 33세)와 레오니드 토프투노프(당시 26세) 등 20~30대 젊은 과학자들은 댜틀로프의 계획에 반대했다. 주 전원의 출력을 낮췄다가 다시 올릴 경우 원자로가 과열돼 폭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댜틀로프는 젊은 과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결국 댜틀로프의 무리한 실험은 젊은 과학자들의 우려대로 26일 새벽 원자로 폭발로 이어졌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체르노빌 참사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할 법한 무리한 실험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1년여 만인 1987년 6월 소련 법정에 선 체르노빌 원전 책임자 아나톨리 댜틀로프(손으로 턱을 받치고 앉은 사람). 소련 법정은‘중대한운영상의 실수’를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했다. 댜틀로프는 1990년 가석방된 뒤 독일뮌헨으로 이주했다가 1995년 사망했다. /프리피야트닷루 웹사이트

원전 책임자, 반대 의견 무시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체르노빌’은 댜틀로프의 실험 강행 이유에 대해 “당시 지역 공산당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댜틀로프가 실험 업적을 앞세워 수석엔지니어로 승진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댜틀로프는 (원전 사고에) 몇 년 앞서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었다. 이후 그는 더욱 괴팍해졌고 원자력 기술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에 집착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체르노빌 원자로 사고가 발생한 직후 댜틀로프는 현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7년 소련 법정은 댜틀로프를 체포해 ‘중대한 운영상의 실수’라는 죄명으로 10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1990년 가석방된 뒤 5년으로 감형받았다. 댜틀로프는 사고 당시 발전소 본부 쪽에서 실험을 지휘하다가 피폭돼 그 후유증으로 사고 9년 후 사망했다. 한편 현장에서 사고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던 젊은 과학자 아키모프는 전신(全身)이 방사능에 피폭됐고 토프투노프도 심각한 피폭으로 사고 발생 3주 안에 모두 숨졌다.

댜틀로프는 1995년 사망 직전 ‘체르노빌 사고, 어떻게 해서 발생했나’라는 자서전 형식의 책을 썼지만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으로 원자로의 구조적 결함과 부실 설계를 지적했을 뿐 자신의 실수나 젊은 과학자들과의 갈등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시설만큼 중요한 건 시설을 운영하는 인간”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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