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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합

[Why] 가슴 설레던 그 시절 찾아… '청춘극장'의 어르신들

  •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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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1.04.09 03:22 | 수정 : 2011.04.09 18:42

    추억의 영화 상영하는55세 이상 전용관
    물 좋은 문화공간으로

    "이야~ 나탈리네, 나탈리 우드여. 쟤가 참 이뻤지. 정말 이뻤지." "어머나, 제임스 딘 아냐?" "에휴, 딘이 아니고 비티잖어. 워런 비티. 참말 잘생겼지?"

    지난 6일 오후 3시 엘리아 카잔 감독의 '초원의 빛'(1961년작)이 상영되고 있던 서울 청춘극장. 영화예고편, '그 시절 대한늬우스'가 나올 때만 해도 와작와작 팝콘 깨무는 소리만 요란하더니, 나탈리 우드와 워런 비티의 격정적인 키스로 시작되는 첫 장면이 나오자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물 좋은’실버들의 문화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청춘극장’. 서울시가 서대문로터리에 있던 화양극장을 개조해 지난해 10월 어르신 전용 극장으로 문을 연 뒤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왼쪽이 극장 내부 모습.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물 좋은’실버들의 문화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청춘극장’. 서울시가 서대문로터리에 있던 화양극장을 개조해 지난해 10월 어르신 전용 극장으로 문을 연 뒤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왼쪽이 극장 내부 모습.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청춘의 그 뜨거웠던 열정에 감동하는 이들, 60~70대 '어르신'들이다. 지난해 10월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문을 연 55세 이상 어르신 전용극장 '청춘극장'(옛 화양극장)에 새 작품이 걸릴 때마다 찾아오는 단골관객이 절반 이상. 극장에 따르면 관객의 70~80%가 1940년생 전후의 70대 노인이고, 60%가 남성이란다. 자신들이 10대, 20대에 보았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 찾아오는 관객들. 박명훈(71)씨는 "아, 다시 봐도 나탈리 우드는 정말 아름답다. 그 시절 남자들의 우상이었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중절모를 멋지게 쓰고 온 원동식(75)씨는 "젊어서 술 퍼마시느라 못봤던 명화들을 이제라도 보게 되니 이거야말로 고상하게 늙는 방법 아니겠냐"면서 "상영프로그램이 적힌 전단지를 늘 품에 가지고 다니다가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며 웃었다. 60대의 조카, 교회 친구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정영자(71)씨는 "처녀시절 본 '초원의 빛'을 다시 보니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설렌다"면서 "그때는 딸 디니 입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지금은 그녀의 부모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게 된다"며 활짝 웃었다.

    서울시가 지원·운영하는 청춘극장은 일요일을 뺀 매일 오전(11시), 오후(3시) 두 차례에 걸쳐 추억의 영화를 상영한다. 월·화·수는 외국영화, 목·금·토는 한국영화다. 하루 평균 650석이 찰 만큼 인기다. 객석 점유율 58%로 웬만한 시중 영화관보다 높다. 한국영화보다는 외국영화의 인기가 더 높은 것도 특징. "옛날엔 외국영화 수준이 더 높았으니까요." 지난 6개월간 가장 '흥행'한 영화도 '애수'와 '닥터 지바고'다. 한국영화는 '여자의 일생' '민며느리'처럼 여성들이 구박받는 내용의 영화가 관객을 끌었다.

    '어르신 전용극장'이라 재미난 풍경도 심심찮게 펼쳐진다. 잠 없고 부지런한 노인들은 오전 9시부터 극장 앞에 와서 문 열기를 기다린다. 10시에 매표소가 가장 북적인다. 100명 선착순으로 티켓과 함께 빵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극장 내부의 '청춘카페'에서는 커피와 팝콘을 무료로 제공한다. 극장 로비엔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뮤직박스'가 있다. 전직 팝칼럼니스트 백승엽씨가 DJ. 국내외 흘러간 가요, 흘러간 팝송을 틀어주는데 요즘은 '고장난 벽시계''사랑의 밧줄'이 가장 인기란다.

    오전 오후 영화를 반복해 관람하는 영화광들도 많다. 이들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든다. 청춘극장 관객이라고 하면 500~1000원씩 깎아주는 식당이 생겼을 정도다. '특별공연'이 마련되는 토요일은 '계모임' 하는 여자 노인들로 극장이 북적인다. 전재홍 기획실장은 "보통 점심때쯤 극장 로비에서 만나 각자 싸온 과일과 떡, 김밥을 나눠 먹은 뒤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원로 가수, 원로 코미디언, 서커스단의 공연을 함께 관람하신다"고 전했다.

    청춘극장의 30여 명 직원 중 가장 바쁜 사람은 사회복지사 박연순씨다. "혼자 영화 보러 오시는 남자 노인들이 여자친구 좀 소개해달라 부탁을 하셔서요.(웃음)" 박씨에 따르면 동성 친구들끼리 그룹 단위로 오는 경우가 가장 많고, 다음이 혼자 오는 사람인데, 간혹 손잡고 오시는 커플은 부부가 아니라 연인관계라고 했다. "제2의 파고다 공원이네요" 하자, 박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유, 외화 보러 오시는 손님들 수준이 얼마나 높으신데요. 옷차림도 근사하고요. CEO·교수 등 젊어서 한자리 하신 분들도 은근히 많지요."

    박씨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전화로 프로그램 안내하기. "어느 땐 한 달 프로그램을 다 불러줘야 하거든요.(웃음) 기본 30분 이상 전화 응대를 해드려야 좋아라 하시지요." 요구사항·불만을 즉시 표현하는 노인 관객들 덕에 청춘극장은 몇 가지가 변했다. 활자는 물론, 프로그램 전단이 A4용지에서 A3용지로 커졌고, 한 달치 상영작을 예고하던 것도 석 달치로 늘렸다. 영화해설사도 사라졌다. "해설은 군더더기, 그냥 감상만 하고 싶다"는 여론 때문. "월·화·수에 바빠 외화를 못 보니 목·금·토에 외화를 올려달라는 민원을 서울시까지 하신 분도 계세요. 요즘엔 야간상영 하라는 요청이 제일 많고요."

    간혹 만취한 노인들이 들어와 한숨 주무시고 가는 것 빼고는 노인들의 '물 좋은' 문화공간이 된 청춘극장.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끝까지 객석을 지켰다. 첫사랑 버드(워렌비티)가 결혼한 사실을 알고 돌아서는 디니(나탈리 우드)가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읊는 엔딩장면에선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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