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주인이 명으로 바뀌고 원은 북으로 쫓겨났다. 그런데도 우왕과 친원세력은 북원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저항하였고, 결국 유배형이었다.
유배 오는 길, 정도전은 나주성 동루에 올랐다. 왜구의 창궐로 도처가 시름을 앓던 시절, 바다가 가까운데도 활기찼고 민생은 풍족하였다. 어떤 까닭일까? 나주는 고려 태조가 견훤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준 땅, 태조를 이은 혜종의 외가 고을, 더구나 거란에 쫓긴 현종이 종사를 회복한 근거지였다. 나주의 역사전통을 들추었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부로(父老)들이 백성들을 의리를 알도록 가르친 덕분이다." 유력자들의 교학(敎學)이 고을을 지켰다고 했다. 유배객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하다. 그리고 거평부곡(居平部曲) 소재사(消災寺) 마을로 들어갔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서쪽인데, 우왕 원년(1375) 여름, 34세 때였다.
정도전은 '심문(心問)' '천답(天答)' 등을 저술하고 찾아오는 학자를 만났다. 그러면서 나주의 의롭고 착한 사람을 기록하였다. 제주도로 가다가 왜구를 만나 죽음으로 항거한 호장(戶長) 정침(鄭沈)의 전기를 꾸몄다. 또한 깊은 사찰까지 쳐들어오는 왜구로부터 병상의 큰스님을 끝까지 보호한 젊은 스님을 칭송하였다.
젊은 스님이 구원한 큰스님은 목은 이색조차 '스님 중의 한림학사'로 존중하며 교유한 무열(無說)대사였다. 정도전도 장성 백양사에서 청수 스님과 같이 만났다. 이러한 무열대사가 용진사(湧珍寺)의 누각을 극복루(克復樓)라 이름 지었다. 공자와 안연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어짊이다'라는 대화에서 취한 것이었다. 실로 감탄하였다.
"마음이 근심스러우면 좋은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에도 상심만 더하는 법, 그러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마음이 활짝 열려 항상 즐거운 것이다. 극복루는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즐거움을 변치 않았던 안자의 요체를 얻은 것이다."
당시 무열의 글을 조박(趙璞)이 얻어왔었다. 나주의 속현(屬縣)이던 여황, 즉 지금의 광주 광산구 운수동으로 유배 왔던 부친을 따라와서 가르침을 청한 젊은 유생이었다. 과거를 보러 가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유학을 배운 보람을 세상에 밝게 드러내라. 그러면 나는 살아서 태평한 백성이 될 것이요, 죽더라도 밝은 시대의 귀신이 될 것이다." 의미심장하다. 훗날 개국공신 일등에 올랐는데, 과전법(科田法)을 선창한 조준(趙浚)의 칠촌당질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에게 정녕 소중한 인연은 소재동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순박하고 열심히 농사짓던 사람들은 지체 낮은 부곡에 살면서도 다소 문자를 익혔고, 야담과 전설을 기억하며 또한 인근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또한 술을 빚으면 같이 즐기고 제철 토산물을 구하면 서로 나누었다. 물론 귀양객도 빠뜨리지 않았다. 띳집 두 칸도 이들이 도와주니 금방이었다.
이러한 맑고 밝은 인심을 만나며 정도전은 '나의 귀양살이가 불쌍해서인가, 아니면 먼 시골이라 나의 죄를 몰라서인가?'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소재동은 30대 중반의 정도전에게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의식전환의 배움터였다.
그런데 정도전과 같이 북원의 사신을 반대하였던 전남 나주 반남 출신 박상충(朴尙衷)과 담양 출신 전녹생(田祿生)은 유배길에 세상을 버렸다. 전라도로 온 사람은 살고, 전라도에서 난 사람은 죽었던 것이다. 우연치고는 심상치가 않다.
입력 2011.04.0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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