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박준영 을지대 총장이 말하는 '을지 3代'

조선일보
  • 문갑식
    입력 2011.04.02 03:12 | 수정 2011.04.02 23:40

    천안함 장병 시신 수습한 우리학생들, 자랑스럽습니다
    조부와 부친의 가르침 따라
    장례지도·응급구조학과…
    연평도 사건 보고'잘 만들었다' 생각 들었죠

    할아버지 박봉조

    '인간 상록수(常綠樹)'의 뿌리는 할아버지였다. 박봉조(朴鳳祚·1900~1952)는 고향 황해도 황주 땅과 평양 일대에서 이름을 떨쳤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숭실대 교수직을 내던진 기개에, 영어(英語)실력이 북한 으뜸이었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이 걷던 평양 장별리,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그곳에서 세월 낚던 그에게도 광복은 왔다. 평양교원대, 평양의학전문학교에동시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달콤한 날은 길지 않았다.

    김일성 정권 실세 허헌(許憲)의 딸 허정숙이 찾아온 것이다. "박 교수, 학생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이 더 중요한 과업 아니오?" 거절하자 허정숙의 눈빛이 벌겋게 변했다. 말투도 거칠어졌다.

    '협박'에 못 이겨 그가 북한 외무부 관리가 됐다는 소식이 남한의 미 CIA에도 전해졌다. 그걸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린 사람이 있었다. 숭실대에서 함께 교수로 근무했던 루츠였다. 선교사였던 그는 당시 미 군정청에 몸담고 있었다.

    루츠는 군정(軍政)사령관 하지에게 제안했다. "박봉조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북에서 빼오자!" CIA요원 안내로 38선을 넘은 식솔(食率) 중엔 둘째 아들 박영하(朴永夏·84)도 있었다. 박봉조는 1946년 미 대사관 번역과장이 됐다.

    1952년 10월 26일 박봉조는 척추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의대생 영하에게 당부했다. "의사로 꼭 성공해라. 병원이 번창하면 작은 고등학교라도 하나 세워 육영사업을 해다오." 을지(乙支) 신화(神話)의 씨는 이렇게 전쟁통에 뿌려졌다.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육영(育英)사업을 당부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돼, 다시 자기 아들에게 대학을 맡기자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덕(德)이 쌓여 온 세상에 퍼질 때까지 3대(代)가 걸렸다. ☞ 동영상 chosun.com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아버지 박영하

    월남하기 전 박영하는 평양의전 2학년이었다. 통칭 '평의전'은 김일성종합대학 의대의 전신(前身)이다. 서울대로 적(籍)을 옮긴 그는 1950년 5월 졸업했다. 6월25일, 젊은 의사는 밀린 빨랫감을 안고 모처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외출이나 휴가나온 군인들은 빨리 복귀하십시오!" 전쟁은 꿈많던 젊은이를 의용군(義勇軍)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군의관이 돼 강원도 속초 제1외과병원에서 휴전을 맞은 그는 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에서 나기에 더 아름답다. 질곡의 세월, 박영하는 몇 가지 행운과 조우한다. 국군간호장교였던 아내 전증희(全曾熙·83)를 만난 것이다. 훗날 을지재단과 의료원을 키워낸 힘을 군의관 경험에서 얻은 것도 그렇다.

    "수많은 부상병을 돌보며 쌓은 임상경험은 돈이나 교육만으론 얻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들락거리던 사람들의 상태가 안정됐을 때 내쉬는 안도의 한숨 속에서 느끼는 야릇한 희열, 물론 그게 한순간의 기쁨이긴 하지만요."

    제대한 해 박영하는 을지로 4가에 셋집을 얻어 산부인과의원을 열었다. 단층(單層) 집이 3층, 7층, 11층으로 높아지면서 명성도 높아졌다. 밤낮 없이 환자 치료해주는 열성에 아내가 끓여내는 민어 미역국 맛 소문이 장안에 자자했다.

    성공한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서울, 대전, 금산에 잇따라 병원을 세웠다. 서울보건전문대를 인수한 뒤 의대까지 설립해 지금의 을지대로 키워냈다. 한국상록회는 1998년 5월 그를 이렇게 추대했다. "인간 상록수 박영하!"

    아들 박준영

    비바람 맞아보지 않은 상록수는 없다. 1993년 3월이 위기였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불렀다. "이제부터 병원 일을 맡아다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한 산부인과의 박준영(朴俊英·53·을지대총장)은 일본 게이오대(慶應大)에서 유학 중이었다.

    ―무슨 이유였습니까.

    "아이로니컬하게도 지하철 때문이었어요. 2호선, 3호선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스카라극장, 단성사 쪽까지 우리 병원으로 들어오는 길 자체가 다 막혀버린 겁니다. 하루 120~130명이던 산부인과 환자 수가 2~3명으로 줄 정도였어요."

    ―보통 지하철이 뚫리면 땅값이 오르는 게 상례인데.

    "더 황당한 건 내방환자가 주변 음식점에서 싸우다 다쳐서 온 분들이라는 거였어요. 그렇게 5~6년 지나니 병원 자체가 잊혀버린 거죠. 도심 공동화(空洞化) 영향도 있었고, 여하간 새 병원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그때였어요."

    ―을지로나 충무로에 역사 깊은 병원이 많았죠? 지금의 차병원이나 길병원도 그렇고.

    "산부인과로는 을지와 제일병원이 제일 오래됐고요. 차병원은 스카라극장 앞에서 시작했는데 우리보다는 늦지요. 이길녀 여사는 전공이 다릅니다."

    ―왜 하필 노원구 하계동으로 갔습니까.

    "우린 전통이 있어요. 외자(外資) 빌려 병원 짓지 않기, 이 병원 적자를 저 병원에서 벌어 메우지 않기, 남들 꺼리는 곳에 병원 세워 환자 돌보기, 이런 겁니다. 대전, 금산, 하계동에 병원을 세운 게 다 그 때문입니다. 56년에 시작한 병원을 67년 의료법인으로 만든 것도 병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는 회장님(부친 박영하)의 확고한 원칙 때문이었어요. 의료혜택을 복지개념으로 보신 거죠. 부자 임부(妊婦)는 모포 2장 주고 가난하다고 모포 절반 줄 순 없는 거잖아요."

    ―그래도 수지타산 맞추는 데는 안 좋았을 텐데요.

    "하하. 입원비 없어 닭 두 마리 놓고 가는 분도 있고 돈 대신 슬그머니 미역 놓고 가신 분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미역국하고 닭을 싫어해요. 그때 하도 먹어서."

    ―대전에 가기로 한 게 1977년이면 당시 강남 땅값이 비쌀 때도 아니었는데.

    "강남 가면 '대박'날 걸 저희도 알았지요. 병원은 강남에 지으나 강북에 지으나 비용은 똑같이 들어갑니다. 강원도에 짓는다고 설비가 안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얼마 전에 강남 안세병원 사거리에 병원 지은 건 뭡니까.

    "아! 그건 '을지'라는 이름이 너무 잊혀지는 것 같아서 인수한 겁니다. 지금은 상징적인 클리닉만 있는데 앞으로 장기(臟器) 중 하나를 특화한 병원을 만들까 해요. 예를 들면 심장이나 뭐 그런 쪽으로."

    ―을지로 쪽 병원이 결국 나중에 문을 닫았지요.

    "경영이 악화되자 노조가 파업을 벌였습니다. 정작 우리 병원 노조원은 12명밖에 안 되는데 문제는 외부세력이었어요.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점심 먹고 산책 겸 해서 와서 '으쌰으쌰'했어요. 남들은 다 우리 병원 노조원인 줄 알았을 거 아니겠어요. 지금도 그게 제일 가슴 아파요."

    ―병원이야 옮길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가슴이 아픈가요.

    "남들은 병원 오래하면 재산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회장님이 병원을 1950년대에 만드셨는데 집(광장동) 가져본 건 1980년이 처음이었어요. 큰 누이(박준숙·을지의료원장)가 결혼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때 처음 '병원에 함을 들일 순 없다'며 눈물로 하소연했어요. 사실 저보다 누이가 힘들었을 거예요. 매일 이화여고 교복 입은 학생이 산부인과에 들어가니 남들이 어떻게 봤겠어요."

    ―지금 기념관이 된 을지병원에 그런 사연이 있습니까?

    "회장님의 '의사는 항상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어요. 산부인과에 응급 상황이 많잖아요. 그 때문에 저도 을지병원에서 태어나 그 옥상에서 살았고요."

    ―부친이 좀 너무하시네, 옛날 분이긴 하지만.

    "전 어렸을 때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회장님 같은 삶이 너무 싫었거든요. 회장님은 자식이 몇 학년인지도 모르는 분이었어요. 졸업식, 입학식에 와본 적도 없고 24시간 오로지 환자만 본 분이었어요."

    아래 사진은 박준영 총장, 박영하 을지재단 명예회장₩전증희 을지재단 회장 부부, 박 명예회장의 딸 박준숙 을지의료원장.(왼쪽부터) / 을지재단 제공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감래(苦盡甘來)

    인간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지만 이겨낼 순 있다. 그렇게 하기 싫다던 박준영 총장이 의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이나 지금의 '을지'를 굴지의 의료기관이자 교육기관으로 키워내게 된 것은 그가 고2 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부친도 그렇고 박 총장도 그렇고 왜 다 둘째 아들이 가업(家業)을 잇습니까.

    "큰아버지는 의사가 아니셨고, 제 형은 경복고 나와 서울의대를 다녔는데…, 스킨스쿠버하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시신을 며칠 지나서야 겨우 찾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의대 지망한 게 아니었군요.

    "제가 용산고 2학년 때 그 사고가 났어요. 원래 공대나 동물학, 아니면 생물학을 전공하려 했지요. 그런데 그 일 있고 나서 그전까지 아무 말 않던 아버님이 '의대 가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의학에 정(情)을 못 붙였어요. 뒤늦게 공부에 재미 붙인 건 일본유학 갔을 때였어요."

    ―동물학, 생물학도 의학과 관련 있는 거 아닌가요.

    "문형, 내 이래 봬도 동물 키우는 데 조예가 있어요. 모터사이클도 사고 나기 전까진 제법 탔고요. 동물은 사자, 호랑이 빼곤 다 키워봤어요. 뱀은 국민학생 때부터 키웠는데 한때 병원 옥상에서 700마리가 넘었어요. 그걸 팔아서 용돈 벌 정도였어요. 12㎝짜리 악어를 2m까지 키운 적도 있어요. 술 취한 보호자가 박제인 줄 알고 손을 악어 입속으로 넣었다가 물리는 통에 예전의 창경원 동물원에 넘기긴 했지만."

    ―왜 하필 뱀입니까. 혹시 뱀탕을 좋아합니까.

    "전 왠지 차갑게 보이는 게 매력 있더라고요. 움직임도 경박스럽지 않고. 뱀탕은 안 먹어요."

    ―의사가 되기 싫었다지만 경영권을 맡은 후 혁신적인 변화가 일었습니다. 일례로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설립 같은 게 그런데요.

    "대학을 맡으며 '블루오션(Blue ocean)이 뭘까 생각했어요. 전 대학의 사명이 논문이니 뭐니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소수의 천재보다 80점 이상 정도 되는 성숙한 사회인 배출, 그게 대학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지도학과는 서해페리호 사고, 구포역 열차사고를 보면서 착안한 거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예전에 염(殮)하는 걸 사람이 하는 일 중 제일 낮은 걸로 쳤죠. 그렇지만 인간 보건의 마지막 보루가 장례잖아요. 말기암으로 사망한 분은 아주 야윕니다. 각종 사고로 사망한 분들은 또 어떻고요. 마지막 가는 모습을 그리 보낼 순 없죠. 유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잘 보내드리면 망자(亡者)로 인해 가족이 화합할 수도 있잖아요."

    ―천안함 피격으로 사망한 군인들도 을지대 학생들이 맡았지요.

    "원래 사진처럼 복원하는데 15명이 열흘간 작업했어요. 자세한 얘기를 하면 유족들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더 안 하렵니다."

    ―그 과에 지망하는 학생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소신 있는 학생들입니다. 경쟁률은 별로 높지 않지만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이 거의 없어요. 취직도 잘돼요. 3~4학년 때 전부 '입도선매'돼 수업이 지장을 받을 정돕니다. 보수도 일반학과 졸업자보다 몇 백만원 더 많고요."

    ―최근 일본 지진 해일을 보니 박 총장께서 만든 응급구조학과의 의미를 알겠더군요.

    "그 학과도 대형 사고 보면서 착안한 겁니다. 척추 안 좋은 분을 마구잡이로 구조해보세요. 살아도 후유증이 클 거 아니겠어요. 구조에도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관계부처에선 아무리 설명해도 그 중요성을 모르더군요. 그래서 제 돈 들여 미국 EMT라는 기관을 견학시키고 그랬어요. 응급구조학과는 연평도 사건 보고 저 스스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군은 둘째치고 민간인들에 대한 대비가 너무 허술했잖아요."

    ―중독재활복지과도 특이합니다.

    "우리나라 마약중독자가 연 1만건이라는데 검거율이 그렇다면 실제는 10배로 봐야 해요. 타이거 우즈, 그 친구가 뭐가 아쉬워서 이 여자 저 여자와 관계했겠어요. 그거 섹스중독이에요. 우리나라라고 섹스중독 없겠어요? 그럼 정신과, 임상심리, 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뤄 치료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없잖아요. 우스갯소리지만 우리 회장님(아버지)도 '일 중독'이고, 근데 그건 건전한 거니 치료할 필요는 없고, 하하!"

    ―여가디자인과는 뭡니까.

    "그건 제가 조기 유학하다 실패한 학생들을 위한 전공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 만든 겁니다. 영어는 잘할 테니 스키, 요트, 경(輕) 비행기 같은 걸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법을 배우면 방학 때 외국 가서 아르바이트할 수도 있고, 그런 게 고용창출 아니겠어요?"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상록수 3대(代)

    박 총장의 돈에 대한 철학은 확고하다. "제가 직원이나 교수님들께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쓰는 돈은 한국에서 제일 귀한 돈이다, 자기 허리띠 졸라맨 부모들이 자식 위해 내놓은 등록금에, 목숨 담보로 한 치료비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아까운 돈을 남을 위해 척척 내놓은 건 뭡니까? 장학재단에 불우이웃돕기, 군 장병 위문 등 셀 수 없을 정도인데요.

    "회장님이 그렇게 사시는 모습을 평생 지켜보면서 저도 그렇게 된 거겠지요. 할아버지 기일(忌日) 같은 날엔 항상 유언을 되풀이해 말씀해주시고. 그렇지만 전 노력하지 않는 이에겐 도움을 주지 않아요. 일례로 의대생들이 전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인데 장학금을 주더라도 대학에 와서 일정 성적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북한돕기도 열심이었는데 고향이 이북이기 때문인가요.

    "2000년에 의사단체 따라 북한에 가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맨 먼저 눈에 띈 게 병원에 식당이 없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가족이 매일 밥 해와야 한다는 거지요. 맥주병에 고무 호스 끼워 링거 만드는 것도 봤어요."

    ―맥주병에 고무호스?

    "나중에 통일되면 경제는 둘째치고 의료가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의료는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그때부터 전 아프리카 돕는 것보다 북한 돕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가요.

    "X레이 찍을 땐 방사선 막는 차폐(遮蔽)시설이 필요합니다. 기사는 납조끼를 입어야 하고요. 그들이 하는 조치는 한 달에 한번 감귤 나눠주는 것뿐이래요. 그게 방사선에 좋다고요. X레이 소리는 왜 그리 큰지, '철커덕'하고 무슨 대포 소리 같아요. 방사선이 얼마나 새나오는지 아무도 몰라요. 근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무슨 소립니까.

    "의료장비만 줘봤자 소용이 없어요. 전압이 엉망이니, 전력시설 해줘야 하고, 또 그걸 돌릴 기름 대줘야 하고, 끝이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시다 2007년에 사건이 생겼죠?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제 용산고 동기인데 장관 그만두고 북한 가본 적이 없다고 해서 제가 데려갔어요. 그런데 묘향산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사단이 일어난 겁니다."

    ―무슨 사단입니까.

    "김일성·김정일이 받은 선물 전시관을 본 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제가 종석이 보고 그랬거든요. '야! 네가 왜 저기 서 있느냐.' 그 말에 종석이가 픽 웃었는데 그걸 본 보위부원이 이 장관에게 달려와 '당신이 일국의 통일부장관으로 수령님을 욕보일 수 있느냐'고 난리를 쳤어요. 저보곤 그걸 인정하라고 생떼를 쓰고. 그때부터 안 들어갔어요."

    ―이 전 장관은 원래 북한에 긍정적인 분 아닌가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긴 했지만 남쪽 장관을 욕보이려는 의도였겠죠. 전 북한 돕는 건 좋지만 선은 그어야 한다고 봐요. 이북에서 원치도 않는데 먼저 돕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 많거든요. 그러니 버릇이 이상하게 든 거지요."

    ―돌이켜보면 질풍 같은 3대입니다. 월남해 전쟁 치르고 그 잿더미에서 병원 일으킨 뒤 육영사업에, 다시 블루오션 창출까지.

    "오는 2017년이면 IMF 세대들이 대학 입학할 때지요. 인구가 줄어 전국 대학이 입학정원 채우기도 힘들 텐데, 전 그게 제일 신경쓰여요. 그런데도 자꾸 국가는 민간의료기관 죽이려 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같고요."

    ―같은 의원에서 시작한 다른 병원들은 금융업이니 뭐니까지 범위를 넓히는데 혹시 아쉽진 않나요.

    "전 절대 의료보건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요. 본업에 매진한 사람 죽는 거 보셨어요? 제가 여유 있으면 할 수 있는 만큼 봉사하고, 돈 없어 병 못 고치는 사람 도와주면서 사는 게 제일이지요."

    ―언젠가 '장기려 박사처럼 되고 싶다'고 한 글을 봤습니다.

    "장 박사님은 저희 집안과도 교류가 깊었고 의사의 표상(表象) 같은 분이지요. 이렇게 사는 게 진정한 의술이고 의인(醫人)이구나 하는. 저도 부족하지만 그분처럼 되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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