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만에 찾은 강화도는 몰라볼 만큼 딴판이었다. 곳곳에 길이 닦이고 팬션이 들어섰다. 초지대교를 건너자 갯벌 건너 해풍이 불어왔다. 뻘에 뿌리처럼 새겨진 물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방사능을 태평양으로 쫓아버리는 고마운 편서풍.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이 연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언제라도 갯벌에 내리꽂히려는 품이, 클러치와 액셀을 동시에 밟으며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경주차 같았다.

서울 촌놈 바람 목욕으로 때 벗기는데, 시인 함민복(49)이 초지인삼센터 주차장으로 마중나왔다. 지난달 6일 결혼한 새신랑은 이곳에서 아내 박영숙(49)씨와 함께 '길상이네'라는 인삼가게를 한다. '길상이'는 그가 키우는 개 이름이다. 시인의 말대로 "아유, 이젠 너무 늦어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부부는 상호(商號)에 강아지 이름을 붙였다.

아내 박씨는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제가 주목받을 이유가 있나요. 신문에 나면 모든 사람이 다 볼 텐데…." 강화 수삼이 정말 좋다며 쪽칼로 삼 껍질을 쓱쓱 벗겨 건넬 때는 활달하고 싹싹했는데, 카메라 앞에 세우려니 좀체 쉽지 않았다. 시인은 거들지 않고 "안 찍을 텐데, 인터뷰 안 할 텐데"라고만 했다. 충북 중원(현 충주시) 출신의 남편과 충북 음성 출신 아내의 부창부수(夫唱婦隨)에 사진기자만 애를 태웠다.

두 사람은 작년 6월 2일 혼인신고를 하고 살다가 지난달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여의도 사학연금회관에서 치러진 혼인에 500여 인파가 몰렸다. 소설가 김훈이 주례를 섰고 문단과 강화도에서 하객이 몰렸다.

시인과 제자였던 두 사람은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하는 긴 상(床)을 함께 들기로 했다. “방바닥에 파스 놓고 등을 굴려 파스 붙이던” 시인의 고독이 끝났다. 함민복 시인의 아내 박영숙씨가 “주목받을 이유가 없어서” 사진을 안 찍겠다는 걸 살살 구슬려 바닷가 벤치에 앉혔다.

―혼인신고하고 살면서 왜 결혼식을 안 했습니까.

"안 했으면 좋겠더라고요. 쑥스러워서. 그런데 처가 형제들이 말도 안 된다고 해요. 장모님이 아흔이신데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해서요.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도 결혼식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하기로 했죠."

함 시인의 어머니는 줄곧 "장가들라"고 했다가 아들 나이가 쉰에 가까워지자 "이젠 안 되겠다"고 했단다. 시인이 마흔여섯 때 "한 일곱 살만 나이를 속이면… 다들 나이 속이고 장가가서 잘들 살던데" 했던 어머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며느리를 보고 돌아가셨다. 둘이 만나던 시절 어머니 입원해 있던 병원에 함께 가서 인사를 했었다. "그때는 결혼할지 말지 모르는 때여서 좀 망설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한 거죠." 함 시인 모친은 2009년 1월 1일 별세했다.

두 사람은 7년 전쯤 김포의 한 문학교실에서 강사와 학생으로 만났다. 당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다니던 아내 박씨는 영등포에 살면서 김포까지 시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함민복의 시 강좌'를 들으러 다닌 혐의가 짙다. 함 시인은 "그때 경북 상주에서도 오고, 충남 천안에서도 강좌 들으러 왔는데요, 뭘"이라고 말했다.

산을 좋아하는 박씨는 23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북미대륙으로 떠났다. 미국캐나다의 산에서 트레킹을 하며 지낸 뒤 남미로 넘어가려다가 귀국했다. 언니 친구가 강화에서 하는 인삼 가공공장의 재무 일을 봐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그게 3년 전쯤 일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함 시인은 아내를 '저기' 또는 '여기'라고 칭했다.

"저기가 청주여상 나와서 재무 쪽 일을 오래 했어요. 학생회장도 하고 그 언니도 학생회장 하고. 직장 다니면서 야간대학 사회복지학과 다니고… 저랑 비슷해요. 컴퓨터나 전자계산기 때리는 것 보면 대단해요. 따다닥 컴퓨터 칠 때면 글씨에서 먼지가 확 일어난다니까요." 한전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는 수도공고를 졸업한 뒤 경북 월성 원전(原電)에서 의무 근무로 4년간 일한 함 시인은 이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로 진학했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부인도 애초엔 결혼 않고 혼자 산다고 했다면서요.

"신혼여행 다녀온 뒤에 강화도 분들이 축하 자리를 만들어줘서 같이 나갔어요. 그때 사람들이 소감을 물으니까 '좋은 아내보다는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내가 술을 많이 먹고 하니까 연민을 느꼈나."

두 사람은 제주도로 3박4일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대학 시절 수학여행에 가지 않아 유일한 비행기 탑승 기회를 놓쳤던 함 시인은 비행기도 처음 탔고 제주도에도 처음 갔다. "비행기 처음 타면 좀 무섭지 않나요?" 하고 묻자 아내 박씨가 "무서워하더라고요. 손에 땀이 쫙 났더라고" 하고 대신 대답했다.

함 시인은 마흔살 때 후배 주례를 선 적이 있다. 그때 생애 처음으로 "거금 사십만원을 지불하고" 양복을 사 입었다. 그날 주례사를 다듬어 쓴 시가 '부부'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노총각 때 어쩜 그렇게 절절한 시를 썼습니까.

"친구들이 부부싸움을 하고 나한테 상의를 많이 했어요. 부담이 없어서 그런가. 이런 식으로 상담해주죠. 집에 들어가면서 바로 잘못했다고 하면 어떡하냐. 너 혼내킬려고 별별 걸 다 연구하고 있는데 들어가면서 바로 미안해, 그럼 안 되지. 처음엔 좀 퉁기는 척하다가 나중에 '그런 것도 모르고 난…' 이렇게 사과해야지. 하하하."

함 시인은 숫기가 없고 낯을 가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된 말로 '구라'가 상당했다. 작품을 봐도 그의 유머감각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대학 다니던 시절 명동 '지하촌'이란 술집에 자주 다녔는데 돈이 없어 공짜 단무지 안주에 술을 마셨다. 그때 단무지를 늘 '파인애플'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그 술집이 문을 닫게 됐다. "손님들이 안주 대신 파인애플만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함 시인은 다음날 진짜 파인애플을 세 통 사 갖고 가 외상값을 갚았다.

별명이 '안종'인 그의 친구 이야기도 재미있다. 어느 날 전화 걸어온 친구는 "유럽에서 안종문학상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재차 묻자 그의 친구는 "번역하면 노벨문학상이라던가?"라고 대꾸했다.

숭어회 안주에 막걸리가 세 통쯤 비워져 가고 있었다. 예전 월세 10만원짜리 바닷가 집에 살 때 "월세 10만원, 담뱃값 15만원"이라고 했던 시인은 '아리랑' 담배를 피웠다. "누가 담배인삼공사 가니까 그렇게 쓰여 있더래요. '담배로 다친 폐, 인삼으로 치료하자.' 웃자고 하는 소리겠죠. 하하하."

―부인과 다투지는 않습니까.

"뭘 다투겠어요. 운전할 때 제가 참견하는 정도죠. 운전은 저기가 하고 저는 면허가 없지만 조수석에 오래 타봤잖아요. '내가 조수석만 28년 무사고야, 천천히 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가난한 시인은 결혼과 함께 아내의 차까지 얻어 타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결혼식을 하니 결혼이 실감 나겠네요.

"동네 사람들끼리 영화 보는 모임이 있는데 결혼식 후에 거기 나갔더니 잘 아는 분이 영화 보는 스크린에다가 우리 사진하고 시하고 각종 자료를 비추면서 축하를 해줬어요. 집사람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둘이 나이도 같고 친구 같고 또 고향도 바로 옆 면(面)이거든요. 서로 사투리로 말하면 바로 개그가 돼요."

―가게에 부부가 늘 같이 나옵니까.

"아침에 같이 나와요. 차 타고 나오면 6분 걸려요. 그리고 걸어서 들어가면 1시간 걸리죠. 길이 안 막히니까 차로 걸리는 시간의 딱 10배가 들거든요. 다시 저녁때 걸어 나와서 문 닫고 같이 들어가요. 하루에 두 시간씩 걸으니까 건강에도 좋고."

―장사가 잘되나요.

"아유, 잘 안 돼요. 삼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고 하는데, 진열하면 마르기 시작하고 또 썩어서 버리는 것도 있고." 이때 아내 박씨에게 5만6000원짜리 수삼을 주문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함 시인은 "저거 팔면 6000원 남는다"고 했다.

―결혼 전엔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책 인세도 있고, 시작(詩作) 강의도 있고, 산문 쓰고 원고료도 받고….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니까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요. 모은 건 하나도 없지만." 그는 최근 제6회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5월 7일 시상식에서는 '무려' 1000만원을 상금으로 받게 된다.

―시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건 무엇입니까. 시를 배운다고 쓸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글로 옮기는 걸 어려워해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걸 옮기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과 표현이 떠오르고 하는데. 생각을 글로 옮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죠."

―시를 잘 쓰는 방법이 있습니까.

"자기를 낮춰야 할 것 같아요. 어린이들을 다 시인이라고 하는 게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면 시를 못 써요. 자기를 낮춰야 사물들이, 대상들이 하는 말이 들려요. 고교생들을 한 4년 가르쳤었는데 깜짝 놀랄 때가 많았어요. 한 학생이 '개나리꽃이 사각기둥에 피었다'고 썼어요. 제가 '나무가 무슨 사각기둥이냐'고 하니까 그 친구가 '제가 본 건 그래요'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개나리꽃을 확인했더니 꽃 피는 가지는 모두 사각이더라고요. 아이들이 보는 것을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해서 못 봐요. 그 학생이 또 '어렸을 때는 방역차를 따라다녔는데 이젠 피하게 된다. 내가 크면서 점점 벌레가 돼 가는가 보다'라고 썼어요. 재미있는 발상이죠.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모든 아이가 시를 기막히게 잘 써요. 그런데 잘 쓴다고 여기저기 보내서 글쓰기 가르치면 그때부터 틀이 굳어져요. 아이가 글 재주가 있으면 책을 많이 읽히고 자유롭게 놔둬야 하죠."

―시를 읽지 않는 시대이지만 시의 힘을 믿겠죠.

"1988년에 조성만 열사가 명동성당에서 투신자살했을 때, 고은 선생님이 장례식에서 낭송했던 시가 있어요. 그때 저는 시에 힘이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한번 듣고 그 시를 암송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저도 '실천문학'으로 데뷔하고 싶어서 '함성'이란 필명으로 실천문학과 세계의 문학에 시를 보냈는데 실천문학에서 채택하지 않았죠."

강화에서 숲의 기운과 뻘의 힘을 받으며 사는 시인은 물고기 전문가, 꽃 박사가 되었다. 동막 포구에서 헤어지면서 시인은 "복숭아꽃 필 때 숭어가 제일 맛있으니 그때 놀러 오라"고 했다. 뺨이 발그레해진 '노소년(老少年)'의 눈가에 천진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