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인으로… 여인, 거장으로

조선일보
  • 송혜진 기자
    입력 2011.03.30 03:08

    "뵙자마자 이렇게 외쳤죠 귀여운 아이돌로만 남기 싫어요 저도 몰랐던 제 모습 찾아주세요"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소녀… 그 세련된 젊음, 우아한 발랄함은 내 깊은 곳 영감을 끄집어냈다"

    목말랐다, 초조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때, 운명처럼 만난 손정완과 '소녀시대' 제시카 -'디자이너와 뮤즈' 그 두 번째 이야기, Photograph by 조세현

    "도전에 목말라 있었다. 지금 내 성공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유 없이 초조했고. 날 움직이게 해줄 미지의 고객, 젊은 뮤즈가 필요했는데 이 무렵 만난 게 제시카였다. 보는 순간 '아, 이 친구면 내게 영감을 줄 수 있겠다' 싶었다."(손정완)

    "선생님을 먼저 찾은 건 나다. 3~4년 전부터 귀여운 아이돌 가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뵙자마자 이렇게 외쳤던 기억이 난다. '저도 미처 몰랐던 제 모습을 찾고 싶으니 도와주세요!'"(제시카)

    제시카가 손정완 디자이너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짓는다.“ 저 좀 달라 보이죠”라고 묻는 것 같다. 제시카가 입은 옷은 올 2월 손씨가 뉴욕패션위크 무대에 올렸던 누드 베이지 실크 드레스. 허리 주름 아래로 떨어지는 선이 유혹적이다. /조세현
    디자이너 손정완(52)과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멤버인 제시카(22·본명 정수연). 두 사람은 4년 전 처음 만났다. 손씨의 패션쇼에 찾아온 제시카와 첫 인사를 나눈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땐 몰랐다고 했다. 뜻밖에도 참 적절한 시기에 서로를 만났다는걸.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한 번 깨보고 싶은 열망을 소리도 없이 품고 있었다는걸. 그렇게 두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화를 꿈꿨던 디자이너와 뮤즈

    두 사람을 향한 첫 질문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둘다 요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다고 들었다.

    2월 17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쇼를 마치고 왔다. 데뷔 24년 만에 처음 뉴욕패션위크 무대에 선 것이다. 쇼를 했던 디자이너 147명 중 유튜브에서 쇼를 생중계해준 디자이너는 15명뿐이었는데 내가 그중 한 명이었다. 영화배우 앨런 릭맨(Rickman), 가수 오브리 오데이(O'Day)도 직접 와서 쇼를 지켜봤고. 450석 좌석은 물론 스탠드석까지 꽉꽉 차 있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4월 초에 일본에서 새 앨범을 발매하기 때문에 요즘 녹음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앨범 사진 촬영 때문에도 바쁘고. 시간만 허락됐다면 선생님 뉴욕 쇼에 직접 가보고 싶었는데….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를 기억하는지?

    패션쇼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아이돌 가수 하면 대부분은 그저 귀엽고 깜찍한 모습만 떠올리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제시카는 조금 달라 보였다.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넸고 태도도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었다. 세련된 젊음, 우아한 발랄함을 봤다고 해야 하나?

    평소 존경했던 디자이너여서 무척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무척 쾌활하게 받아주셔서 금세 무장해제가 되더라. 그래서 보자마자 선생님 쇼 작품 중 어떤 옷이 가장 맘에 들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서로를 통해 변화를 꿈꾸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작년부터. 항상 뉴욕에 진출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20년을 넘기고 있었다. 한국에선 난 이미 상업적으로 충분히 성공을 거둔 디자이너지만 좀 더 강렬한 작품을 들고 새 무대에 서고 싶었다. 이때 제시카의 농담이 큰 아이디어를 줬다. '스케치할 때 저 같은 아이를 위한 옷을 만들면 뉴욕에서도 성공할 것 같은데요?'라고 하는 거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맞다' 싶었다. 금세 펜을 잡았고 뉴욕 컬렉션을 구상했다.

    난 반대로 선생님 컬렉션을 보면서 재작년부터 스타일을 바꿔온 것 같다. 그동안 '소녀 가수'라는 한계 때문에 편하고 귀여운 옷 위주로만 입고 무대에 섰고 괜히 나이 들어 보이면 어쩌나 싶은 걱정에 긴 치마도 잘 안 입는 편이었다. 하지만 뮤지컬 연기를 시작하고 일본 무대에도 진출하면서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때 선생님의 컬렉션이 큰 힘이 됐다. 낭만적이면서도 성숙한 옷에 눈을 돌린 거다.

    손, 이종(異種)의 매력을 결합하다

    ―오늘 제시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럼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

    맞다. 금색도 회색도 아닌 오묘한 빛깔의 실크 드레스인데, 굳이 노출을 하지 않아도 관능적인 느낌을 주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 뉴욕 컬렉션 무대에 내놨던 옷이지만 제시카를 위한 옷이기도 하다.

    맘에 꼭 든다. 다들 이런 내 모습은 처음 본다고 할 것 같다. 이번 뉴욕 쇼 룩북을 열심히 뜯어봤는데 이질적이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를 한데 모아놓았다고 하면 될까? 오묘하고 복합적인 느낌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비즈·니트·공단·가죽·밍크 같은 소재를 한데 모아놓으면 사실 복잡하고 어지러워 보인다. 이걸 교묘하게 섞어서 새로운 매력의 옷을 창조해보려고 했다. 아이 같지만 다시 보면 성숙함을 물씬 풍기고 새침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매력이 있는 옷. 꼭 제시카처럼(웃음).

    제시카, 여성성을 걸치다

    ―제시카가 손 디자이너에게 특별히 주문한 옷도 있다고 하던데.

    항상 부탁한다. 나처럼 키가 훤칠하지 않은 사람(164㎝)을 위한 옷도 많이 만들어달라고(웃음). 그 말에 선생님은 뜻밖에도 긴 치마를 권했다. 작년 서울패션위크 때 입고 갔던 프린트 스커트 같은 옷. 솔직히 그전엔 용기가 없어서 입질 않았는데 막상 입어보니 어울리는 데다 더 날씬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요즘엔 선생님 권유로 통 넓은 나팔바지도 시도 중이다.

    나도 제시카 덕분에 없던 용기를 쥐어짜서 뉴욕으로 갔으니 제시카도 이젠 모험을 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일본 무대에선 1970년대 패션을 시도해도 좋을 것 같다. 더 요염한 분위기를 내봐도 좋고. 난 가을에 뉴욕 무대를 다시 준비할 생각이다. 다시 알몸으로 서는 심정으로.

    선생님 덕분에 변화의 여지를 얻었다. 수동적인 아이돌이 아닌 스스로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가수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하나. 그 계기를 얻어서 행복하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건 곧 젊다는 뜻이니까.


    ☞ 손정완은… 국내 매출 400억 성공… "지금부터 시작"

    숙명여대 산업공예과 출신의 손정완은 학창 시절부터 옷을 남다르게 입고 다니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넌 화실 차리지 말고 디자이너를 하라"는 친구 말에 국제복장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운 뒤 의류회사를 다니다 1987년에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가게를 냈다. 1990년 갤러리아백화점에 입점했고 1993년 황금바늘상, 2005년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받았다. 2006년 파리 캐주얼 의류 전시회 '후즈 넥스트'에 외국인 디자이너로는 처음 초청됐고, 올해 2월엔 뉴욕패션위크에 진출했다. 연간 국내 매출액이 400여억원에 이를 정도로 성공한 상업디자이너지만 손정완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옷 스케치 못지않게 초등학생 아들의 글짓기 숙제를 봐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는 "가정은 내 상상력의 또 다른 원천"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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