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태가 악화하면서, 일본 정부가 '방사능 공포'로 인한 국가적 공황 사태를 막기 위해 위기를 실제보다 축소하려 한다는 의혹이 잇달아 제기되고 있다. 사태 직후 음료수 내 방사성 물질 허용 기준치를 국제 기준보다 최대 30배 높게 발표하고, 채소의 경우 '물에 씻은 뒤 방사선량을 측정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갑자기 WHO 규제치보다 30배 느슨한 지표 제시한 日 정부
일본 후생노동성은 지난 17일 각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보낸 ‘방사능 오염 식품의 취급에 관해’라는 제목의 공문에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당분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지표를 잠정규제치로 하겠다”며 규제 지표를 첨부했다. 후쿠시마 지역 수돗물에서 방사성 물질이 처음 발견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첨부한 지표에는 물을 포함한 음료수 1kg당 방사성 요오드의 규제치가 300Bq(베크렐)로, 방사성 세슘의 허용 기준치는 200Bq로 나타나 있다. 이는 이전까지 일본수도(水道)협회가 참고해온 세계보건기구(WHO) 규제치보다 각각 30배와 20배가 높은 수치다.
WHO가 2004년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기준에 따라 만든 ‘음료수 수질 가이드라인’에 나타난 음료수 1kg당 방사성 요오드와 방사성 세슘 규제치는 각각 10Bq이다. 일본수도협회는 2004년 570페이지에 이르는 이 WHO 가이드라인을 일본어로 전문 번역해 지금까지도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 같은 비상시에 일시적으로 방사성 물질 섭취 허용량을 완화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사항”이라며 “비상시에 적용하는 국제 기준의 경우 물 1kg당 방사성 요오드를 3000Bq까지는 마셔도 된다고 허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채소는 방사성 농도 측정 전 물에 씻어야’ 지침도 논란
채소에 포함된 방사능 측정법에 대한 정부의 지침도 논란이다. 후생노동성은 원전 사태 이후 채소의 방사성 물질 측정법을 ‘수확 후 물에 씻지 않은, 흙이 묻은 상태로 즉시 측정’에서 ‘물에 씻은 후 측정’으로 바꿨다.
이런 내용은 23일 도쿄대학병원 방사선의료팀 한 관계자가 트위터에 “후생노동성에서 측정 방법을 바꾸라고 연락이 왔다”는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지표를 인용해 매뉴얼을 바꿨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이번에 공표된 음료수와 채소에 대한 방사능 측정 방식과 기준은 이번 대지진과는 무관하게 2007년 5월 비상 상황에 대비해 만들어 둔 매뉴얼 상의 규제치와 동일하다.
◆국민들 반발… “정부가 뭔가를 속이고 있다”
일본 국민은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원전 사태를 은폐·축소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 최대의 인터넷게시판인 ‘니챤네루’(2ch)에 음료수 문제를 주제로 만들어진 토론방에는 24일 하루에만 1000개가 넘는 글이 올라왔다. “기형아가 속출할 것”이라거나 “생수를 마실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의 안전보다는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등의 글이 주를 이뤘다.
채소의 방사성 물질 측정 방식에 대해서도 “왜 갑자기 바꾸었는지 해명하라”, “정부가 뭔가를 속이는 느낌”이라는 등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정부 “그동안 규제 너무 엄격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최근 들어 아예 공개적으로 방사선 오염 기준치를 상향 조정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국제방사선방어위원회(ICRP)는 21일 오염지역 주민들의 이주를 막기 위해 일반인의 연간 피폭한도 기준치를 현재의 연간 1m㏜(밀리시버트)에서 지금의 20배인 20mSv로 상향 조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되면 이주 대상 지역이 대폭 축소된다. 예컨대 26일 기준으로 하루 0.028mSv의 방사선이 검출되고 있는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경우, 지금 상태대로라면 이 지역 주민은 365일간 총 10.22mSv의 방사선을 쐬게 돼 이주 대상이지만, 바뀐 기준을 적용하면 이주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 내각부 식품안전위원회는 식품과 음료수에 함유된 방사선 물질의 규제 기준도 지급보다 더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방사선 규제에 너무 엄격했다는 전문가 견해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 사이에선 “정부의 대응은 앞뒤가 뒤바뀐 것”, “그런다고 원전 주변에서 맘 편히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등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