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순한글로 된 교서(敎書·국왕령을 담은 문서)를 처음 내린 임금은 선조였다. 임진왜란을 맞아 피란길에 오른 왕은 처음으로 언문(諺文·한글) 교서를 방방곡곡 내걸었다. 한글이 창제(1443년)되고도 150년이 지난 뒤였다.
본래 교서는 한문이 원칙이었다. 간혹 언문 번역본도 함께 반포한 경우가 있지만 교서 전체를 언문으로 반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유는 왕이 한글을 사랑한 때문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왕실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정주리(서울대)·시정곤(카이스트) 교수가 낸 책 '조선언문실록'(고즈윈)에는 이처럼 한글과 통치의 내밀한 상관관계가 소상히 소개되어 있다. 1592년 4월 한양 도성을 등진 선조왕의 처지는 참담했다. 백성은 왕실의 도주로를 막아섰고 지방 수령들은 줄행랑쳤다. 군사들이 왜군에 투항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다만 천대받던 노비와 백성들이 의병으로 나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있다는 전갈만 간간이 들려왔다. 왕에게 남은 희망은 그들이었다. 민심을 다독이고 백성들의 응전을 독려하기 위해 1593년 9월 '그들의 말'인 언문으로 교서를 내렸다.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백성들에게 귀환을 종용하는 내용이었다.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정보를 캐오면 상을 준다는 내용도 넣었다. '진실로 손에 침을 바르고 일어나서 우리 조종(임금의 조상)의 남아 있는 은덕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내 관작을 아끼지 않겠다. 그 결과 살아서는 아름다운 칭송을 받게 되고 자손까지도 그 은택이 유전되리니 이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쏘냐?'
책에는 이밖에도 조선시대 한글 사용에 투영된 다양한 시대상이 담겨 있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부터 마지막 순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 한글 관련 내용을 추렸다. 그 결과 드러나는 '언문(諺文·한글을 낮춰 부른 말)'의 자취는 실로 크고 넓다. 왕실에서는 공부 안 하고 놀기 좋아하는 종친(왕세자 이외 왕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비교적 수월한 언문 교재로 기본 인성과 덕성을 가르쳤다. 왕세자도 대왕대비부터 여러 빈(嬪)에 이르는 왕실 여성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문을 익혀야 했다. 사대부들도 짐짓 한문으로 읊고 적었지만 여성과의 필담에는 언문을 썼다.
한글은 또 대외적으로는 기밀이자 암호이기도 했다. 중국에 통역하러 갔던 병기 담당 관리 주양우는 현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줬다가 '국가기밀누설죄'로 벌 받았다. 왜란 중에 아군은 적군이 모르도록 언문 문서를 돌렸다.
한글 창제 이후 유난히 많았던 남녀 치정사건도 언문 서신이 꼬리로 밟힌 경우가 많았다. 남녀 간의 언문 '소통'이 자주 선을 넘어 통하는 일로 번졌다. 언문은 급기야 민감한 '나랏일'이나 정치사건에도 다리를 놓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중대사'는 이이첨(인목대비 폐위 주역)과 김 상궁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런 언문이 비로소 나라의 '국문' 지위에 오른 것은 탄생 약 450년 만인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였다.
입력 2011.03.2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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