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발생한 강진(强震)은 진앙으로부터 373㎞ 떨어진 도쿄의 퇴근길을 마비시켰다.
지진 발생 후 3시간쯤 지난 11일 오후 5시 50분. 도쿄의 미나토구(港區) 미타(三田) 게이오대(慶應大) 남문 앞 도로는 인파(人波)로 넘쳐났다. 수도권 내 모든 지하철 노선이 운행을 중단하면서 '지진 난민'이 된 도쿄의 샐러리맨들이었다. 몸을 서로 부딪칠 정도의 엄청난 인파였지만 '대화'는 없었다. 침묵 속에 소방방재청의 사이렌 소리가 귀청을 찢을 정도로 요란하게 울렸다.
도로는 전철 운행이 중단되면서 쏟아져 나온 자동차로 끝을 알 수 없는 정체상태가 됐다. 버스도 만원이었다. 정류장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게이오대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타마치역으로 가자 인파는 더욱 늘었다. 근처에는 NEC 등 기업체가 몰려 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통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고, 도로가 마비되면서 수 백만명이 어깨를 서로 부딪쳐가며 4~5시간씩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歸家) 전쟁'이 시작됐다. 육교를 건너는 동안 다시 여진이 왔다. 구름다리를 걷는 듯 육교가 출렁였다. 행인들은 비명 대신 몇 초간 걸음을 멈춘 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뒤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지진 발생 이후 시민들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일제히 거는 바람에 상당기간 유선·무선전화가 모두 불통됐다. 저녁 9시쯤 유선전화가 일부 개통되자 공중전화마다 안부 전화를 걸기 위해 수십명씩 줄을 서기도 했다. 휴대전화 회사는 '안부 확인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전화 통화량을 분산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귀가를 포기한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편의점에 몰려들었다.
편의점의 컵라면·빵 등이 금세 동이 났다. 걸어서 집을 향해 걷던 시민들이 밤이 깊어지자 귀가를 포기하고 건물 계단 등에서 밤샘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관측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도쿄 등 대부분의 지역은 시민들이 침착하게 대응했다. 기자가 근무하는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히도쓰바시의 건물은 11일 오후 2시 46분 '이러다가 건물이 정말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벽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시민들은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지진 이후 여진이 발생하자 안내 방송에 따라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 상당수는 미리 준비해 놓은 헬멧을 쓰고 재난가방을 들고 인근 기타노마루공원으로 대피했다. 일본은 지진에 대비해 직장·학교 등에 재난 대비용품을 미리 준비해두고 공원 등 피난장소도 지정해둔다. 도쿄는 건물 천장 붕괴 등으로 일부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지진 이후 체육관 등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각종 행사들도 건물 안전 점검을 위해 모두 취소됐다. 일본 정부는 TV와 라디오 등을 통해 "무리하게 귀가하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내진 설계가 된 건물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거듭 내보냈다.
일본은 워낙 지진이 잦아 공중화장실, 피난장소, 안전한 도로 등이 표시된 '지진시에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는 지도집'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거리엔 헬멧을 쓰고 이 책을 가이드 삼아 귀가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 시민은 "밤을 새울 곳도 마땅치 않고 지도를 보고 가면 4~5시간 정도면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시청은 또 귀가가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초·중·고등학교와 구청 등을 긴급피난 장소로 지정, 잠을 잘 수 있도록 했다. 밤 12시 15분에도 여진이 발생하는 등 시민들이 밤새 공포에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