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뺑소니 택시 한달간 현미경으로 뒤져 '증거' 찾아

조선일보
  • 정희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 이철원
    입력 2011.03.08 21:48 | 수정 2011.12.15 15:16

    CSI 드라마처럼 단박에 증거 찾아내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람 친 흔적도, 혈흔도 없는 차 밑바닥 하나하나
    테이프로 훑는 끈질긴 집념으로 사건 해결

    정희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내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약칭 국과수)에 들어온 것은 대학을 갓 졸업한 1978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과수'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약학을 전공했으면 번듯한 약국을 차려 돈이나 벌지, 왜 쥐꼬리만한 월급에 험한 일을 하는 곳에 가서 고생을 하느냐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참 많이 들었다. 게다가 입사 몇 년 후 이사한 새 청사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서울 변두리에 있었기에 출퇴근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국과수가 공중파 TV 드라마의 무대로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고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과수에 들어와 약·독물과 마약 분야 전문가로 성장하면서 약·독물과장, 법과학부장을 거쳤다. 1995년 유명가수가 의문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약·독물과장이었다. 시신을 부검했더니 오른팔에서 주삿바늘 자국 28개가 나왔다. 마약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혈액과 소변 검사를 했는데 엉뚱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만 나왔다. 언론에선 사인(死因)을 밝히라고 성화인데 열흘을 씨름해도 어떤 물질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일 때도 끊임없이 실험을 되풀이하는 꿈을 꿨다. 후배 직원들도 내가 '빨리 알아내라'며 다그치는 꿈을 꿨다고 했다. 13만 종이 넘는 화학물질 샘플과 하나하나 맞춰 나가다가, 마침내 동물용 마취제라는 걸 알아냈다. 후련했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국과수가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CSI(Crime Scene Investigation)와 얼마나 비슷한지 묻는다. 나도 CSI 팬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있다. "증언이 아니라 증거를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섬 반장처럼 우리 국과수도 초동수사 현장에서 채취한 증거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범죄 당시의 현장을 재구성하고 범죄를 증명하는 것이 최종목표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척척 현장에서 증거를 발견하고 숨겨진 범행도구를 속 시원하게 찾아내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드라마는 대개 한 편 방영 분량인 1시간 이내에 사건이 해결이 되지만 현실에선 한 건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몇 날 몇 달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범죄수사에서 획기적 역할을 하는 유전자(DNA) 분석도 시청자들은 시약을 묻히면 금세 색깔이 바뀌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결과가 제꺼덕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증거물 한 개를 분석하는 데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린다. 어떤 사건의 경우는 DNA 분석을 해야 할 증거물이 100개 이상이 될 수도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계산을 한 번 해보시라.

    TV 드라마와 현실이 다른 점은 또 있다. 드라마에선 요원들이 현장에 나가 증거수집은 물론, 범인을 심문하고 체포하는 일까지 해치우는 '만능수사관'처럼 연기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장조사 전문 채증반이 증거물을 수집해 실험실로 의뢰하고 실험실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분석을 하는 식으로 일을 나눠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얼마 전 CSI를 봤더니 피살자 옷에 묻어 있는 밀가루 성분을 분석하여 살인 용의자가 피자 가게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작년 연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우리나라의 '쥐식빵' 사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국과수에 분석해달라고 맡겨온 '쥐식빵'을 우리 연구원들은 집중공략했다. 빵의 지방산 함량과 칼슘·마그네슘·나트륨 함량을 측정했고, 탄소 안정동위원소비까지 비교했다. 그래서 이 식빵이 경쟁 제과점이 아니라 범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제과점마다 식빵을 만드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식빵 성분을 분석하면 어느 집에서 만든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쥐 발바닥에서 접착제인 끈끈이 성분을 발견, 누군가 이 쥐를 고의로 잡아서 식빵에 넣었다는 것도 알아냈다. '쥐식빵' 하나를 분석하는 데도 이처럼 다양한 과학기술이 활용돼 빵에 담긴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작년 서울에서 있었던 뺑소니 사건은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과학수사의 기본을 돌아보게 했다. 젊은 여성이 차에 치여 죽었는데, 목격자는 물론 현장에 아무런 물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변 CCTV를 모두 조사했더니 택시 한 대가 그 주변을 지나간 것이 보였다. 그러나 택시에도 혈흔이 없고, 사람을 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건을 의뢰받은 담당 직원은 한 달 이상 택시와 씨름했다. 사람을 치었다면 뭔가 어디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 차체 밑면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훑어가며 현미경으로 찾던 중 청색의 모직 섬유가 눈에 띄었다. 피해자가 입고 있었던 스커트의 섬유와 같은 것이었다. 현미경으로 찾아낸 미세한 섬유 한 점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된 것이다. 이런 끈질긴 집념이 국과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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