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동해에 방사능물질 투기.. 외교문서 공개

입력 2011.02.21 10:58 | 수정 2011.02.21 11:14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980년 김일성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떠올랐을 때 재외공관에서는 그를 “김일성보다 강경론자로 알려져 있다”,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이 그에 의해 주도된 점을 고려하면 김일성보다 더 호전적이므로 북괴가 대남한 관계에서 강경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분석한 전문을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통상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공개하도록 한 규칙에 따라 1980년도를 전후해 만든 외교문서 1300여건을 21일 공개했다.
이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재외공관에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각되고 서열 5위에 오른 것을 중시, 그가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이 시기에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연이어 북한을 방문하면서 미북(美北) 간의 직접 접촉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7월 14일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했고, 그해 9월 2일엔 토머스 레스턴 전(前) 국무부 부대변인이 평양을 방문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미국에 “전직 고위 관리의 방북을 저지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레스턴이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것은 미국 정부의 정책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지 여부도 당시 우리 정부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1980년 1월 10일 박동진 당시 외무부 장관은 미 행정부가 한반도 정세에 관한 비밀 보고서를 각각 상ㆍ하원 외교위에 제출했다는 정보를 입수,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보고서 내용을 입수ㆍ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우리 정부는 같은 해 북한에 대한 총기 실탄 수출 문제를 놓고 서독과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1980년 7월 서독의 탄약회사인 ‘다이너마이트 노벨’이 북한으로 수출하려던 캘리버 22의 실탄 46만5000발 중 4000발을 운송 도중 서베를린에서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알게 된 주독일 한국대사관은 해당 실탄이 공산권에 수출할 수 없는 물품에 속한다고 서독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서독 정부는 “스포츠용 소구경 실탄이라 수출을 허가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우리 정부는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주변국들도 바짝 긴장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미국의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은 그해 5월 22일 주미 중국대사를 초청, “북한이 한국 내 정세를 오판, 모험에 나서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같은 달 31일엔 독일개신교협의회(EKD) 소속 한인 목사들이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독일 주요 도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외교전문이 밝혔다.

이밖에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는 우리 정부가 1968년부터 4년간 약 45t의 저수준 방사능 폐기물을 동해 상에 투기 처리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 폐기물은 두께 15cm짜리 보관용기에 밀봉된 채 울릉도 남쪽 12해리 수심 2200m 지점에 버려졌으며, 정부는 두 차례 현장 조사를 한 뒤 “검출되는 방사능 수준이 자연 상태의 바닷물과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정부는 중국과 수교하기 12년 전인 1980년 양국 간 우호를 다지기 위해 ‘중국’이라는 공식 호칭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는 당시 “국제정세에 현실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나아가 최근 다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공에 대한 감정을 아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긍정적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자유중국(대만)과 동등하게 공식적으로 호칭할 것을 건의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당시 공식석상 및 논평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비방적 용어인 ‘북경정부(정권), 중공정부(정권), 중공(당국)’ 등을 사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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