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청소부 된 교장 선생님… 창업 돕는 부행장님

조선일보
  • 이인열 기자
    입력 2011.02.12 03:01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14] '100세 시대'의 희망을 찾는다

    체면을 버려라…
    처음엔 보직 없이 허드렛일 4개월 만에 청소부로 '승진'
    방문객들에 가이드 역할도… "일하는 데 귀천이 없는 법"

    경험을 살려라…
    은퇴한 은행지점장·공장장… 베테랑 경력·노하우로 '창업'
    서민들 상대로 컨설팅 해줘… "수익과 보람 두 토끼 잡아"

    준비하는 이들에겐 '100세 시대'가 행복하다. '인생 80'에 맞춰진 시간표를 발 빠르게 재설계하며 희망을 키워가는 실험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60대 초반 교장직을 떠난 뒤 '체면'을 버리고 청소부로 변신해 '평생 근로'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고, 50대에 부행장, 지점장, 대기업 임원에서 은퇴하고 경험을 살려 서민 창업과 서민 대출을 도우며 보람을 찾기도 한다.

    청소부가 된 교장 선생님

    경기도 가평강원도 춘천의 경계에 반달 모양으로 생긴 남이섬. 드라마 '겨울연가'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이 섬에는 매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빗자루와 집게를 실은 전동차를 몰고 오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신명호(71)씨. 14만평 남이섬 곳곳을 누비며 쓰레기를 치우는 입사 4년차 청소부다. 그는 9년 전 교장이었다.

    "지금 건강이라면 여든 (살)이 넘어서도 일할 것 같습니다."

    강원도 남이섬에 설치된‘천사의 날개’모형 앞에서 대학생들에게 이 섬의 명물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전직(前職) 교장 선생님 신명호(71)씨. 그는“나이 여든이 돼도 일자리를 통해 멋지게 다시 한번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신씨가 청소부가 된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2003년 3월 학생 수가 2000여명인 경기도 한 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만 62세에 정년 퇴임한 그는 노후를 놀면서 보내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격증을 따볼까 고민해봤지만, 자격증을 따더라도 예순이 넘은 사람을 뽑아줄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포기했다. 우선 맨발로 뛰어들었다. 집(가평) 근처 골프장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인 직원 동료들과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잡초도 뽑고 벙커 정돈도 했다. 마냥 노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하루 일당 3만5000원은 아쉬웠지만 1년여 만에 그만뒀다. 서너 달 쉬는데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이번엔 동네에서 가까운 제지공장에 도전했다. 폐지를 모아서 다시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40㎏ 뭉치의 폐지를 옮기는 일이 주된 업무였는데 힘이 부대꼈다. 2개월여 만에 그만뒀다.

    그러던 중 남이섬을 관리하는 업체에서 정년 80세를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노인 재취업 프로그램이 잘돼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찾아갔다. 연간 3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개중엔 한류 열풍으로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다 신씨가 익숙한 중고생들도 많았다. 이만하면 일을 하면서도 보람도 있겠다 싶어 도전했다.

    처음엔 보직 없이 허드렛일을 했는데, 4개월 만에 청소부로 '승진'했다. 그는 지난 2008년과 2009년엔 100여명의 직원 중 남녀 각 1명씩 뽑는 최우수 사원에 2년 연속 뽑히기도 했다. 늘 웃는 얼굴로 방문객들에게 좋은 가이드 역할까지 해내는 그를 높이 평가해준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청소부 한다면 좀 쑥스럽지 않나요. 남이섬에는 옛 동료 교사나 제자들도 올 텐데요."(기자) "예, 종종 만납니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일에는 귀천이 없는 법입니다. 더구나 100세 시대에는요."(신명호씨)

    서민 대출 상담하는 부행장님

    '희망도레미'. 소중한 꿈을 한 계단씩 키워가도록 돕는다는 뜻의 이 업체는 서울 충정로2가 한 빌딩의 4층에 있다. 주로 서민층을 상대로 창업하려는 사람들에게 컨설팅을 해주거나 서민금융 전문기관인 '신나는 조합'과 제휴를 맺어 대출 상담에 조언을 해주며, 컨설팅 비용을 받는 곳이다.

    하지만 흔히 있는 업체와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전 직원 21명 모두가 은퇴자들이다. 더 놀라운 것은 21명의 면면이다. 전직 은행 부행장, 지점장, 대기업 공장장, 대형 제약사 이사, 고위 공무원…. 하나같이 50대(代) 한창나이에 직장에서 나왔다. 누구보다 낙담했을 법한 이들이 남들의 희망을 키워준다는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차린 것이다.

    저마다 직장에서 베테랑 경력을 갖고 있어 창업과 대출 과정에서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대출해간 업체를 대상으로 창업 후 방문을 통해 경영 노하우도 지도해 준다. 돈 빌려준 뒤 이자 떼먹을까 관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공을 돕는 확실한 사후관리(AS)까지 해주는 것이다. 서민들에게 이들의 정보와 지식은 제법 큰 도움이다. 2009년 5월에 문을 열었는데, 벌써 200여곳에 컨설팅을 해줬다.

    "자양동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50대 아주머니를 위해 세종대 경영학과 학생들을 불러 마케팅 전략 등을 상의해줬는데, 대박을 터뜨렸죠."(목진호·61·전직 부동산신탁회사 임원)

    "도봉구 번동의 소규모 아파트 단지 밀집 지역에서 세탁소를 하는 아주머니에게는, 세탁소가 없는 아파트 단지를 골라 집중 공략하라고 조언해 매출이 확 올랐습니다."(김광열·61·전직 은행지점장)

    이들이 뭉치게 된 것은 한 시민단체에서 은퇴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희망도레미를 주도한 한석규 대표(65·전 외환은행 부행장)는 "나이 들어 봉사활동이나 취미생활로 소일할 게 아니라 돈도 벌고 사회에도 도움되는 일을 하자고 뭉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12명이 모였다. 각자 300만원씩 갹출했다. 책임감도 높이고 지속가능 모델을 위해서였다.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해 지금 21명까지 늘어난 것이다.

    "은퇴 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정신적인 공황이 더 무섭더라고요. 내가 평생 매달린 지식과 경험을 한순간에 사장(死葬)시켜 버리고 그냥 놀아야 한다는 것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죠. 큰돈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20년 살지 30년 살지 모르는 노후에 '수익과 보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좋은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희망도레미 직원들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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