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3조원의 예산으로 인문·사회·자연과학·공학 연구를 지원하는 한국연구재단의 오세정 신임 이사장이 "신진 학자와 창의력 있는 연구자들을 위한 실질적 지원제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오 이사장은 "그동안엔 학자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평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똑같이 나눠주자는 분위기로 흘렀다"면서 "평가의 전문성을 강화해 이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은 2년 전 한국학술진흥재단·한국과학재단·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3개 학술 지원기관의 창구를 통일해 지원 효율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그러나 통합 재단 출범으로 학문 풍토와 연구 업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 대신 "서로 읽지도 않는 허접한 논문들을 양산하느라 교수들은 바쁘기만 하고"(김진석 인하대 교수), "엄청난 양의 쓰레기 같은 논문이 쏟아진다"(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비판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연구재단의 '등재(登載) 학술지'에 실린 논문의 편 수로 학자를 평가하는 현실 탓이 크다. '등재 학술지' 제도란 한국연구재단이 특정한 학술지를 지정해 거기에 게재된 논문만을 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각 대학도 교수의 임용·승진·연봉 책정에서 등재학술지 논문 게재 실적을 따져왔다. 학자들은 업적을 평가받기 위해선 등재학술지에 논문이 많이 실리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논문을 2~3개로 쪼개 싣는 편법으로 한 해 15편의 논문을 쓰는 교수까지 나타났다.
한국연구재단이 먼저 논문의 양적 평가와는 별도로 그 논문이 학계에 끼친 영향을 고려해 질적으로 의미있는 논문엔 가산점을 줘야 한다. 학술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든 학자나 남들이 꺼리는 분야를 연구해 무게 있는 저서를 낸 학자들에겐 지원 혜택이 우선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번역이 어려워 우리말로 된 책이 없었거나 오역(誤譯)으로 훼손된 고전을 새로 번역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마땅한 대우를 해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이 학계에 군림하지 않고 뒤에서 후원해준다는 자세를 갖고 각 분야 연구과제를 선정·관리하는 프로그램 매니저들이 해당 학문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나선다면 한국의 학문 풍토도 조금씩 달라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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