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어 굶주린다는 北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는 어떻게?

입력 2011.01.18 21:43 | 수정 2011.01.19 13:58

“최근 북한에서는 군인들이 굶주림을 못 이겨 집단강도행각을 벌이는 등 군기문란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2월 29일 열린북한방송)

“국내 방송사가 제작한 드라마들이 DVD로 복사돼 북한으로 반입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으니까 장사꾼들이 두만강 너머 북한에서 판다.” (2010년 10월 20일 자유아시아방송)

최근 국내에 알려진 북한 내부 소식들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굶주림을 못 이기고 있다’는 소식과 ‘한국 드라마 DVD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뉴스는 같은 나라에서 나온 이야기 같지 않다.

북한에서도 상류층들만 한류(韓流)를 즐기는 것일까. 단순히 양극화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말은 다르다. “북한 주민 중에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라. 상류층만의 얘기는 결코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국경 지역 사람들은 거의 100% 한국드라마를 보고, 국경과 먼 원산에서도 보는 이가 적지 않다”고 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굶주린 주민, 한국 드라마에 빠진 주민들은 둘 다 가능한 이야기다. 굶주림과 한류 열풍은 별개의 문제”라고 전했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보는 것, 그렇게 어렵고 비싼 일 아냐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경제적 희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컬러TV와 ‘알판’(CD)을 재생할 기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 CD재생기 가격도 생각보다 싼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DVD는 가격대가 높아서 상류층에서만 유통되고 있다.

탈북지식인단체 ‘NK지식인연대’의 김흥광 대표는 “1990년대 초만 해도 TV 있는 집이 몇 없었는데, 요즘에는 90% 이상의 주민들이 (값싼) 컬러TV를 갖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대북 단파 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의 류현수 기자는 “TV 있는 집은 거의 CD 재생기도 있다고 보면 된다. 중국산 중고가 북한 돈으로 4만5000원(최근 북한의 쌀 1kg 값이 2000~2500원)에 팔리고 있다”고 했다.

‘알판’ 값은 더 싸다. 북한의 시장에서는 북한 돈으로 대략 2000원 정도면 한국드라마가 녹화된 CD 1장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다지 인기 없는 CD는 이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다. ‘성공적인 통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성통만사)’의 김영일 대표는 “CD를 많이 가진 주민이 비디오방 같은 대여점을 열어서 몰래 CD를 싸게 빌려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CD 대여료는 북한 돈으로 최저 100~200원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전기다. 최근 북한은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겨울철 피크타임때는 정전되는 경우도 많지만, 적어도 하루에 4~5시간은 전기가 들어온다”며 “때로는 TV를 보려고 전기를 불법적으로 끌어오거나 자동차 배터리를 집에 들여놓는 경우도 있고, 배전국 직원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단속은 무용지물 USB에 저장해서 노트북으로 보는 이도

“북한에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몰래 보다 적발돼 수감된 주민이 120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12월 6일 NK지식인연대)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영화를 보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단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상류층부터 한국 드라마·영화를 즐겨보기 때문에 실효는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당 간부들 중 상당수가 주민들에게 뺏은 CD·DVD를 소각하지 않고 되팔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북한에서는 CD와 DVD 등을 모두 재생할 수 있는 만능 리더기가 유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국의 단속이 심해지자, 대신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고 한다.

김영일 대표는 “중국산 미니 노트북이 북한에서 굉장히 저렴하게 팔리고 있다”며 “중국 돈으로 100~200위안(한화 약 1만7000~3만4000원) 정도에 팔리는데, 중국에서도 정말 안 좋은 것”이라고 했다.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북한에 보급된 컴퓨터는 약 200만대 정도로 추산된다”고 했다.

노트북의 장점은 한둘이 아니다. 일단 USB드라이브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손쉽게 저장할 수 있다. 단속에 걸릴 위험도 낮다. 또 배터리를 충전하면 전기 없이도 재생가능하다. 특히 한국산 노트북은 배터리 수명이 길어서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배고픈 것과 한국 드라마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무리 값이 싸다고 해도 돈이 나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북한 주민들은 왜 한국 드라마를 돈 내고 사서 보는 걸까? 이에 대해 대북매체 관계자들은 “한국 드라마는 북한 주민들이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낙이자 문화수단”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중국 등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 사실상 수교가 단절된 상태다. 변변한 문화시설을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TV를 틀어도 매일 김정일 부자(父子)와 당을 선전하는 내용만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지친 일상에서 도피할 수단은 한국 드라마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흥광 대표는 “북한에도 한국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시장에서 돈을 제법 번 사람도 있다”며 “최소한 3끼를 해결할 수 있고, 조금이라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국경에서 넘어오는 한국 드라마 CD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 북에서는 볼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고 별로 할 게 없으니까”라고 했다. CD를 살 돈이 없다면 믿을만한 마을 친구나 지인 집에서 함께 보는 수도 있다.

예전처럼 쌀이 없긴 해도 굶어 죽는 사람은 줄어들었다는 전언도 있다. 열린북한방송 류현수 기자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쌀이 유통되질 않아서 정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그렇지만 요즘은 적게나마 시장 등에서 쌀이 유통돼 아사자가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고 했다. 김흥광 대표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허해도 장마당(시장) 생활력은 대단하다. 죽지 않기 위해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쌀이 배를 채워줄 수는 있지만, 문화적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영일 대표는 “식량이야 북에서 모든 사람이 걱정하는 것이고 배고픈 것 외에도 정신적으로 고픈 것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바로 그 정신적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값싼 한국 드라마 CD라는 것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