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길어진 노후… 양로시설 입주자, 보증금 빼내 생활비로

조선일보
  • 특별취재팀
    입력 2011.01.04 02:56 | 수정 2011.12.15 15:05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2] 長壽 리스크 시작됐다

    부실한 노후 준비…
    한국인 은퇴 후 생활기간 예상보다 배 가까이 늘어 절반이 노후 재테크 안 해

    일 찾는 은퇴자들…
    대기업 간부 출신도 택배기사·경비직 도전

    2001년 5월 문을 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소재 '노블카운티'. 20층짜리 2개 동 건물 내부엔 200m 달리기 트랙에다 9개 레인을 갖춘 수영장 등 각종 스포츠·레저 시설들이 구비돼 있다. 입주 보증금만 3억~9억원에 달하는 국내 최고급 양로·요양시설이다.

    9년 전 부인과 함께 입주한 김광태(88·가명)씨는 시중 은행 전무 출신으로, 41년간의 은행 생활을 접은 뒤 중소업체 회장으로 8년을 더 일해 누구나 부러워할 화려한 현역 생활을 누렸다.

    입주 당시 김씨 부부는 보증금 6억원에, 월 생활비 300만원 안팎을 내기로 했다. 저축해놓은 돈이 있어 월 300만원 충당은 문제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2005년부터 보증금을 까먹기 시작했다. 보증금 일부를 생활비로 돌려 쓰는 '역모기지(보증금 일부 전환)' 제도를 선택한 것이다. 월 생활비 300만원에다 잔병치레가 늘어 의료비 부담이 커지면서 은행 잔고가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양로시설서 노후생활… 교직 은퇴 후 노블 카운티에 입주한 최웅기씨가 부모님과 아내의 사진 아래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 최고급 양로시설인 이곳에는 노후 기간이 늘면서 연금생활자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김씨는 "지금도 생각보다 오래 살고 있는데, 점점 의술(醫術)이 발전하니 100세까지도 살 것 같다"면서 "노후가 예상보다 장기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블카운티에서는 현재 500여명 입주자 중 20여명이 보증금을 까먹는 역모기지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노블카운티의 한 관계자는 "보증금은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遺産)이라고 여기던 입주민 중에는 예상보다 늘어난 노후 비용 때문에 (보증금을 깎아 먹는) 역모기지를 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연금생활자가 최고

    '100세 인생'이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면서 '80세 인생'의 시간표에 맞춰 노후를 준비해온 사람들은 비상(非常)이다. 은퇴 후 삶의 기간이 훨씬 길어지자 준비했던 노후 자금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장수(長壽)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인의 장수리스크 지수는 0.87로, 미국(0.37)·일본(0.35)·영국(0.33)보다 세 배 가까이 높다. 장수리스크 지수란 예상치 못한 은퇴 후 기간을 예상한 은퇴기간으로 나눈 값으로, 0.87은 예상보다 87% 더 긴 은퇴 기간을 산다는 뜻이다.

    택배회사 차린 은퇴자… 호텔 지배인 출신 송정의(가운데)씨는 2년 전 동네 노인들을 위해 택배회사를 차렸다. 노후준비가 부족한 노인들이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건당 800원을 받는 택배기사로 나서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그러나 노후 준비는 여전히 부실하다. 본지가 갤럽에 의뢰해 전국 1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노후 준비를 위해 국민연금이 아닌 별도의 재테크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44.1%가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장수 리스크가 커지면서 노블카운티에는 '주류(主流) 교체'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뒤 2005년 입주한 최웅기(67)씨는 전직 중학교 교장이다. 보증금 4억원은 아파트를 전세 준 돈으로, 월 160만원의 생활비는 교원연금(약 200여만원)으로 충당한다. 최씨는 "연금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 못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처럼, 요즘 노블카운티의 주류는 전직 교사·군인·공무원 등 '연금생활자'들이다. 이들의 비중은 개원 초기 10%도 안 됐지만 지금은 30%를 넘겼다.

    원래 이곳의 주류는 강남과 분당 출신에, 직업별로는 전문 경영인이나 변호사·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 출신이었다. 하지만 노후 기간이 길어지면서 매달 안정적인 연금이 나오는 직업군에 전문직이 밀리는 것이다.

    준비 안 된 사람들

    더 절박한 것은 경제력이 없는 서민층 고령자들이다. 지난해 12월 8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주공아파트 7단지 관리사무소 뒤편. 회색 컨테이너 건물 옆에 천막이 쳐져 있고, 대기업 택배 회사들의 트럭이 오가며 소란스러운 하차 작업이 한창이었다.

    '까치 택배'라는 간판이 붙은 이곳은 60대 이상 은퇴자 20여명이 만든 택배 회사다. 여느 택배 회사와 다른 점은 직접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오는 대형 택배 회사들이 단지 내에 물품을 내려놓으면 건당 800원씩 받고 집집마다 배달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인 택배원들은 저마다 잘나가던 현역 시절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건당 800원을 벌려 아파트 단지를 누비는 사연은 이랬다. 대기업 정년퇴직 후 아픈 아내에게 매달 들어가는 수십만원의 약값 때문에 일 나온 이모씨, 공무원 출신으로 아내 병구완을 하다 카드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류모씨, 외국계 회사에서 총무과장까지 지냈지만 조기퇴직 후 돈벌이 나온 정모씨….

    예상보다 빨리 닥치는 '100세 쇼크'는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준비 안 된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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