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하다… 반 박자 느리게, 그러나 팽팽하게

조선일보
  • 한현우 기자
    입력 2011.01.04 02:59 | 수정 2011.01.04 09:41

    뇌종양 이겨낸 뒤 첫 피아노 솔로앨범 낸 음악가 정원영
    수술 후 밴드 음반 내며 '자축'… 이번엔 다시 본업 피아노로
    "한국의 류이치 사카모토? 후배가 준 음반 한 장 있을 뿐"

    정원영의 새 피아노 솔로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어놓고 앨범 속지를 뒤적거리는데,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음표가 기대보다 반 박자 늦게 이어지고 오른손가락 두 개가만들어내는 미세한 불협화의 기묘한 협화(協和). CD가 잘못 걸렸나 확인하려 할 때쯤 노래가 흘러나왔다."앞산에 꽃이 피면/ 님 보러 간다/ 아지랑이 오를 때/ 님 보러 간다"고저장단(高低長短)이 없다시피 한 그의 음성은 초혼(招魂)의 분향(焚香)인 듯 자욱하게 퍼졌다. 문득, 소름 돋았다.정원영의 새 음악에 취해 있던 지난달 30일 그를 만나러 나섰다.그가 교수로 일하는 호원대 실용음악학부는 서울 서초동 이면도로에 접해 있었다.길은 꽁꽁 얼어붙었고 북풍은 산탄(散彈)처럼 휘몰아치는데, 이어폰에서는여전히 피아노와 노래의 향연(香煙)이 자욱했다.

    화려한 밴드 음악 앨범 2장을 낸 뒤 서정적 피아노 미니멀리즘 솔로 음반을 발표한 정원영은“다음번엔 재즈 트리오 음반을 한번 내볼까”하며 웃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머리를 짧게 깎은 51세의 이 음악가는 백열전등 하나만을 벽 쪽으로 켜두어 어둑한 방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좀 어둡죠? 제가 형광등을 싫어해서요. 다들 너무 밝게 해놓고 사는 것 같아요." 그의 음악은 백열등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연주와 작곡, 보컬 등 음악 제 분야를 아우르는 '음악가'다. 그가 '본업'이랄 수 있는 피아노로 돌아와 7년 만에 다섯 번째 솔로 앨범을 냈다.

    4집과 5집 발표 사이에 그는 뇌에 기생하던 종양을 도려냈다. 국내 기술로는 청력을 포기해야 하는 수술법밖에 없어 독일 하노버의 노의(老醫)가 칼을 댔다. 뮤지션에게서 청력을 앗아가려던 세포 덩어리는 참살(斬殺)당했다. 정원영은 즉각 밴드 음반 두 장을 내놓으며 자축연을 벌였다. 그리고 이제야 그랜드 피아노의 긴 현에서 음악을 길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뇌수술 때 깎았던 머리는 완치 이후로도 짧게 유지하고 있다. "혹시 아직도 환자인 걸로 오해하지 않느냐"고 묻자 "요즘 학생들이 저를 잘 몰라서…"라며 웃었다.

    "대부분 쓴 지 오래된 곡들이에요. 종양 판정받은 직후 쓴 곡들이 많고 그전 곡들도 있고요. '벌써 한 달'이라는 곡은 2003년에 쓴 건데 왜 제목을 저렇게 달았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연주해보니까 꽤 슬프기에 '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했죠."

    새 음반 타이틀곡인 '겨울'만 피아노와 기타, 소편성 현악으로 구성됐을 뿐 나머지 곡들은 피아노 독주다. 피아노엔 장식음이 거의 없다. 느리게 진행되는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마치 전력을 다해 천천히 연주한 듯한 느낌이다. '긱스'와 '정원영 밴드'에서는 물론 그의 솔로 음반에서도 듣지 못했던 음악이다. "이렇게 텅 비워놓는 것도 곡만 잘 쓰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멜로디를 더 잘 따라올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피아노 앨범을 내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실험적 일렉트로닉 음악부터 미니멀한 피아노 독주까지 광대하게 개척해 나가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정원영의 행보는 많이 닮아 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사카모토에 관심이 없었다. "후배 뮤지션이 들어보라고 준 음반 한 장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곡 '봄타령'은 애초 '3월이 오면'이었다. 어머니를 여읜 달이 3월이다. "내 작품에 어머니에 대한 곡을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해 왔어요. 중 1인 아들을 키워보니 어머니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요."

    새 음반 끝에 히든 트랙이 한 곡 있다. 이적과 루시드폴이 참여한 밴드 음악이다. 음반 전체의 이미지를 맨 끝에서 허무는 느낌인데, 정원영은 "밴드 음악을 꼭 한 곡 넣고 싶었다"고 했다. "적군(君·이적)이 무척 반대하더라고요. 앨범 망친다고요. 적군은 (타이틀곡인) '겨울'도 빼자고 했어요. 적인지 아군인지 정말…."

    그는 요즘 '슈퍼스타 K' 본선에 오른 장재인의 선생으로 더 유명하다. 작년 최고의 신인 중 하나로 꼽히는 밴드 '칵스'도 그의 제자들이다. "제가 자만할 수 없는 게 너무 훌륭한 아이들이 매년 학교에 오니까 '나도 빨리 연습해야지' 하게 돼요."

    그는 지난 학기 과제로 '짐 자무시 영화 감상평'과 '실용음악과 입시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리포트를 주문했다. '인문학을 모르면 예술 창작을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학생들에게 제가 늘 '너희는 음악만 하기 때문에 음악을 못하는 거다'라고 말해요. 반짝 인기 끄는 음악보다 정말 좋은 오리지널, 그러니까 셀로니어스 몽크나 허비 행콕을 들어야 하고요. 요즘 아이들 '라디오헤드'도 안 듣고 실용음악과에 와요."

    역시 그의 미니멀리즘은 록과 펑크(funk), 재즈, 일렉트로닉의 용광로에서 제련한 단 한 개의 강철바늘 같은 것이었다.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제 음악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그 문장은 자찬(自讚)의 단어로 이뤄졌으나 한없는 겸양(謙讓)의 표현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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