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망했어(I'm broke!)." 2년 전 월스트리트에서 자주 듣던 말이다. 직장을 잃었거나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문서를 은행에 넘긴 패배자들의 단골표현이었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IMF로 압축되었듯 'IMB'가 그들의 몰락한 처지를 상징하는 듯했다.
올해 월스트리트에는 또 다른 IMB 증상이 나타났다. "나 돌아왔어(I'm back!)." GM이 뉴욕증시에 재상장돼 'GM열풍'을 일으키더니 씨티은행을 선두로 금융회사 주식이 뚜렷한 연말 상승세를 보였다. "새해에는 선진국 경제가 미국이 이끌어가는 형태로 살아날 것(푸르덴셜 자문)"이라며 '미국 기관차론(論)'이 몇 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타임스스퀘어는 훨씬 밝아졌다. LED 전광판이 속속 들어선 데다 건물 전체를 도배질한 전광판도 늘었다. 광장 북쪽에 있는 리먼브러더스 본사 빌딩은 바클레이즈 캐피탈로 간판이 바뀌었다. 바클레이즈 전광판에는 일본어·아랍어까지 들어간 새해 인사가 호경기를 자축하듯 유난히 반짝인다.
무너지는 리먼을 산업은행(KDB)이 사려고 했을 때 "나라 망하게 하려고 별짓 다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나라를 망하게 할 뻔하던 그 회사가 바클레이즈에는 창업이래 최대 이익을 남겨주고 있다. 우리는 기회를 놓쳤다. 신중함이 최상의 투자전략이라고 믿고 모험을 꺼리는 사고방식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모든 것이 붕괴하는 아수라장에서 그들은 한국이 놓친 금괴를 단 며칠 뒤에 건져내 멋진 승리자가 됐다.
금융쇼크 병동(病棟)의 중환자실에서 퇴원한 주인공들 속에 씨티·GM처럼 낯익은 얼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달 월스트리트 부동산업계의 최대 화제는 구글이다. 구글이 19억달러(2조1000억원 상당)를 주고 맨해튼의 대형 빌딩을 샀다. 2년 사이 부동산 거래 중 최고 금액이다.
구글보다 더 돋보이는 얼굴은 중국이다. 뉴욕 주식시장에서 12월 두 번째 주는 중국 주간(차이나 위크)으로 통했다. 인터넷 회사인 당당왕을 비롯한 6개 중국기업이 줄이어 주식을 공개했다. 올해 뉴욕시장에 상장한 중국회사는 38개다. 5년 새 최고 숫자다. 중국 주식은 내놓은 가격보다 많게는 2배, 3배 높게 팔린다. 중국을 보는 월 스트리트 투자자들의 꿈이 주가에 투영되고 있다.
2008년 10월 리먼에 이어 모건스탠리가 부도 위기에 빠졌을 때는 중국이 외면했었다. 그 많은 외환보유고를 관리하는 중국투자공사(CIC)는 모건스탠리의 주주이면서도 구제금융을 보내지 않았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후진타오 주석에게 전화로 모건스탠리를 도와달라고 애걸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부총리 선에서 딱 잘라 거절하는 바람에 미국 재무부는 일본에 매달렸다. 미쓰비시UFJ금융그룹이 90억달러 수표를 급히 찔러준 덕분에 지옥의 문으로 빨려들어가던 모건스탠리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에서 돈이 돌아가는 틀은 바뀌지 않았다. 그때와는 달리 중국이 더 깊숙이 들어왔을 뿐이다. 중국은 미국 정부에 8835억달러(9월말 재무부 증권 기준)를 빌려준 최대 채권국가다. 그동안 미국의 호황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사무라이 엔(円)이었다. 이제는 중국이 수출로 벌어들인 엄청난 달러를 월스트리트에 맡긴 채 미국 경제에 불을 때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맥도널드와 캐터필러는 처음으로 달러가 아닌 위안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GM은 올 들어 11월말까지 미국에서 자동차 198만대를 팔았으나 중국에서는 217만대 팔았다. 두 나라는 북핵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지역 문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세월을 보낼 수 없을 만큼 경제적 고리가 한층 단단해졌다.
새해 후진타오 주석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은 북한·이란 핵문제로 맞서고 위안화 절상을 둘러싸고 다툴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한국이 공격받자 항공모함을 보내줬고, 북한 단속을 잘하라는 경고 메시지도 중국에 보내준다. 때로는 북한 때문에, 때로는 딱한 한국 체면을 살려주려고 우리 편에 서주면 많은 한국인은 '역시 미국뿐'이라고 안도한다. 외교·안보만 떼어놓고 보면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까지 뒤얽힌 문제로 충돌할 때 미국이 끝까지 한국 쪽을 밀어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금융위기 3년째, 월스트리트의 중국 러시(rush)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입력 2010.12.24. 23:20업데이트 2010.12.25.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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