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 약, 나이 많다고 건보 적용 차별?

    입력 : 2010.12.16 03:03

    혈액서 추출한 주사제는 환자들, 감염 우려해 기피
    위험 없는 새 주사제는 27세 이하만 보험 적용
    복지부 "비용 절약 위한 것"… 환자단체, 헌법소원 제기

    서른 살의 혈우병 환자 김태일씨는 이틀에 한 번씩 아침마다 '혈액 응고 주사제'를 맞는다. 스스로 팔뚝 정맥에 주사를 놓고 일과를 시작한다. 한 살 때 혈우병이 발견됐으니 주사 맞은 지 29년째다. 체중이 늘수록 주사제 용량도 커져갔다. 혈우병은 피를 굳게 하는 혈액 응고 인자가 선천적으로 결핍된 희귀 질환이다. 사소한 출혈에도 피가 멎지 않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최소 사흘에 한 번은 혈액 응고 인자가 든 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주사를 맞으면서도 김씨는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그가 맞는 주사제는 헌혈된 피를 모아 만든 것이다. 일반인 피에 있는 혈액 응고 인자를 추출해 제조한다. 만에 하나 간염이나 에이즈(AIDS) 감염자가 헌혈한 피가 주사제 원료에 섞이면 김씨도 그런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실제로 혈우병 환자 중에는 과거 혈액 관리 부실로 주사제를 통해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이즈 환자가 20여명, C형간염 환자가 650여명 있다.

    혈우병 환자 김태일씨가 사무실에서 자신의 팔뚝 정맥에 혈우병 주사제를 놓고 있다. 그는 28세 이상은 유전자 재조합 주사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건보정책이 부당한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혈우병 주사제를 만드는 제약회사들은 요즘 기술이 발달해 오염된 피를 거르고 바이러스를 죽이는 과정을 거친다며 안전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김씨는 "정체불명의 신종 바이러스나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prion)은 주사제에 언제든지 섞일 수 있다"며 "평생 수천만명분의 피가 섞인 주사제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27세로 나뉘는 희한한 기준

    김씨와 달리 1983년 이후에 태어난 환자, 즉 27세 이하 환자들은 김씨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만든 주사제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주사제는 헌혈된 피를 원료로 쓰지 않기 때문에 주사제를 통한 바이러스 감염 사고가 날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왜 김씨는 '유전자 주사제'를 맞지 못하는 걸까. 나이가 많다는 이유다. 보건복지부가 '유전자 주사제'의 건강보험 적용 기준을 27세 이하 환자로 묶어놨기 때문이다. 즉 28세 이상은 건보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건보 적용을 못 받으면 월 800만원 이상의 비용 부담이 생기니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올해 30세인 김씨가 혈액 원료 주사제만 맞아야 하는 이유다.

    복지부는 왜 27세로 나누는 걸까. '유전자 주사제'가 혈액 원료 주사제보다 비싸기 때문에 이를 모두에게 허용하면 건강보험 재정이 압박받는다는 이유다. 국내 혈우병 환자는 2000여명이고, 1인당 평균 매년 5000만원이 지원된다. 중증 환자 치료비 등을 포함해 한해 혈우병에 건보 재정 500여억원이 소요된다.

    그래서 복지부는 행정 편의상 환자의 중간 나이에 해당하는 27세를 기점으로 보험 적용 기준을 달리 해놨다. 의학적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환자 나이에 따라 쓸 수 있는 약이 달라지는 유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이 제한 풀어달라는 환자들

    혈우병 환자 단체인 한국코헴회는 지난달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단체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주사제를 달리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정책은 평등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코헴회 정우현 간사는 "미국·영국·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나이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며 "환자들의 80% 이상이 '유전자 주사제'를 선택해 맞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최근 국내에 새로 도입된 '유전자 주사제'는 혈액 원료 주사제보다 값이 싸다. 건보 재정 보호를 위해 혈액 원료 주사제만 쓰도록 나이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 보험약제과 정영기 서기관은 "혈액 원료 주사제 약값을 추가로 더 낮추기로 했기 때문에 나이 제한을 통한 건보 재정 절약은 계속될 것"이라며 "일본도 같은 이유로 일부 환자에게는 '유전자 주사제'를 못쓰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모든 환자가 '유전자 주사제'를 쓸 경우 혈액 원료 주사제 생산이 크게 떨어져 그동안 '혈액 주사제' 판매 수익성으로 약값을 낮게 유지했던 알부민·항혈전제 등 혈액을 원료로 한 다른 의약품 약값이 오르게 될 우려도 나온다. 복지부는 이번 달 안으로 환자 단체와 제약사 등과 관계자 회의를 가진 후 나이 제한을 풀지 말지 결정할 계획이다.

    ☞혈우병

    출혈이 생긴 부위에 피를 굳게 해 지혈(止血) 시키는 혈액 응고인자 8번 또는 9번 등이 선천적으로 결핍돼 생기는 질환. 관절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내부 출혈이 생기기도 하고, 조그만 상처에도 피가 멎지 않는다. 환자는 거의 남성이고, 1만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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