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전체적으로 볼 때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메달을 휩쓴 양궁, 종주국 일본을 확실하게 누른 유도 등 전통적인 효자 종목에 이어 3관왕 박태환과 얼짱 정다래가 이끈 수영과 사격, 육상, 바둑 등이 한국이 아시아 제2위의 스포츠 강국임을 입증하는데 제 역할을 했다.
그런데 하나가 빠졌다. 태권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당연히 메달을 휩쓸어 올 것으로 여겼던 태권도에서 메달 소식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반타작의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선수들의 경험부족과 함께 전자호구가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경험부족의 문제는 한국 태권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선수층이 두텁고 선수들의 기량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태권도 종주국의 숙명이자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수의 체급을 제외하면 국가대표 선수들의 얼굴이 항상 바뀌는 것이 한국 태권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호구의 문제는 어떤가? 이번 아시안게임에 사용된 전자호구는 라저스트(LaJust)였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의 공인을 받은 2개의 전자호구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 아시안게임 한국대표팀은 라저스트 전자호구에 대한 적응 훈련이 부족했다. 왜 그랬을까?
한국에서는, 정확히 말해 대한태권도협회(KTA)가 주최 및 주관하는 대회에서는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사용되지 않는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선발된 국가대표 선수들은 다른 전자호구(케이피앤피)로 선발됐고 아시안게임 대비 훈련은 WTF의 공인을 받은 또 다른 전자호구인 대도(Daedo)로 해왔다. 막바지에 라저스트로 결정된 것을 알고 한 달 반 정도의 훈련을 하고 출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라저스트를 사용하지 않을까?
한국은 이미 라저스트 전자호구를 어느 나라보다 먼저, 어느 나라보다 많이 사용해본 경험이 있다. 2007년, 전국체전 태권도에 전자호구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사용된 전자호구가 라저스트다. 2008년 전국체전에도 사용됐으며 2년 여간 국내에서 열린 여러 대회에서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2009년부터 라저스트 전자호구는 국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KTA가 라저스트 사용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KTA는 왜 라저스트를 포기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저스트 전자호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승부를 올바르게 내는 전자호구라고 볼 수 없다”
양진방 KTA 사무총장의 말이다.
“라저스트 전자호구는 태권도의 기술 발전 등을 고려해 볼 때 문제가 있는 전자호구다”
이러한 견해는 양진방 사무총장만의 생각이 아니다.
윤웅석 KTA기술전문위원회 의장은 “우리가 라저스트를 2년 간 써 보지 않았나. 직접 써 보면서 느낀 것은 점수라는 것이 태권도의 기술로 나와야 하는데, 라저스트 전자호구는 태권도가 아닌 기술로 너무 많은 점수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태권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라저스트의 전자호구로 나오는 점수가 올바른 점수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현재 존재하는 전자호구는 크게 ‘센서식’과 ‘강도측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라저스트는 센서식이다. KTA에 의해 국내에서 사용되는 케이피앤피(KP&P)는 강도측정식이다. WTF의 공인을 받은 또 하나의 전자호구인 대도도 강도측정식에 가깝다. 올해 코리아오픈에서 대도를 사용해 본 KTA의 주요 관계자들이 대도에 대해 ‘라저스트보다 낫다’라는 평가를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KTA를 중심으로 한 국내 태권도계에서 가지고 있는 라저스트의 센서식 전자호구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누가봐도 득점으로 인정되는 가격에서는 점수가 올라가지 않고, 저런 발차기는 득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가격에서는 점수가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센서식 방식에 있다.
전자호구가 아닌 일반호구로 경기가 진행되는 경우, 몸통이나 얼굴 등의 득점 부위에 일정 정도 이상의 강도로 발차기가 적중되었을 때 심판이나 선수, 코치를 비롯한 태권도인들은 점수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강도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 태권도 경기의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가격 시 발생하는 “뻥”하는 소리가 판단에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라저스트 전자호구의 경우, 정확한 부위에 “뻥”하고 대포소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점수가 나지 않는 경우를 한국의 태권도인들은 너무도 많이 경험했던 것이다.
‘전자호구 불가론’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저스트 전자호구는 센서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크게 소리가 나더라도 센서간 접촉이 없으면 득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광저우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된 대만 양수쥔 선수 사건도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가진 맹점의 하나로 제기되기도 한다.
우선 이번 대회에서 사용된 신형 라저스트 전자호구의 발보호대(양말)에는 발뒷꿈치 부분에 센서가 부착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양수쥔은 발뒷꿈치에 센서가 부착되어 있는 구형을 사용하려다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발뒷꿈치 부분으로 가격하면 태권도 규정에서 반칙이 되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뒤차기의 경우 발뒷꿈치로 가격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 발뒤꿈치 윗부분이 가격 범위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라저스트 전자호구가 국내 태권도계에서 지적하는 약점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해외 태권도계 일부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 ‘복불복(福不福)’이라는 것이다. 점수가 되건 안 되건 어차피 조건은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외 태권도계에서는 라저스트건 대도건 전자호구로 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현재 해외 태권도계에서는 아시아 일부와 미국 등을 중심으로 라저스트가, 유럽과 아프리카 등을 중심으로 대도 전자호구가 사용되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사용될 전자호구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시안게임의 부진이 전자호구 탓으로 평가되는 분위기가 많아지자 KTA에서는 최근 재미있는 제안을 내놓았다.
“현재 존재하는 전자호구를 모두 모아 한 자리에서 대회를 치러보자. 하루는 라저스트, 하루는 대도, 하루는 케이피앤피 하는 식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방식이건 3개의 전자호구를 한 자리에서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이 자리에 WTF의 관계자들도 참여해서 내린 결과를 가지고 우열을 가린 후 올림픽에 사용될 전자호구를 결정해보자는 것이다.”
김무천 KTA 운영부장의 말이다. 이것은 아직 KTA가 공식적으로 WTF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자호구에 대한 KTA의 입장을 보여주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KTA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은 이미 전자호구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조직에 비해 KTA에서 가장 많은 경험과 지식을 축적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호구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 집단인 KTA는 라저스트를 포기했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전자호구를 놓고 WTF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전자호구를 사용하겠다고 공언해왔다. WTF는 당초 11월말까지 런던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태권도 경기에 사용될 전자호구를 추천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WTF는 추천을 12월 15일까지로 연기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 어떤 전자호구가 사용될 것인가? 전자호구가 사용되기는 할 것인가? 12월 15일 안으로 이 모든 것이 결정날 것으로 전망된다.
박성진 태권도조선 기자 kaku6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