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금융위기 때 미국 재무부 장관은 헨리 폴슨(Paulson)이었다. 골드만삭스를 세계 최강의 투자은행으로 성장시킨 스타 경영인 출신이다.
지난달 폴슨은 한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후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 몇 달 전에 행동했어야 옳았다.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워싱턴에서 배운 교훈이다." 뒷 문장은 위기 앞에서 행동이 굼뜬 정치권을 겨냥한 말이고, 앞 문장은 정치권 눈치를 보며 결단을 미뤘던 자신을 책망한 말이다.
현대전(戰)과 금융위기는 닮은꼴이 많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국가 위기를 불러오는 결과가 그렇고, 엄청난 비용과 대량의 희생자를 요구하는 비싼'계산서'가 그렇다.
21세기 들어 전쟁과 금융위기의 공통점은 더 늘고 있다. 무엇보다 신속한 회답을 재촉하는 특성이 같다. 이라크 전쟁과 리먼 브러더스 붕괴에서 보았듯 전장(戰場)이나 시장(市場)이나 과거에 비해 폭발성이 엄청 강해져 많은 사람의 생명줄을 끊어놓는다. 무자비한 파괴력은 '선제적 공격'이라는 새 전쟁이론을 탄생시켰다. 사전에, 또는 초기에 재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피해가 깊어지거나 사태가 장기화한다.
미국 정치권도 2년 전 금융위기 때 게으름을 피웠다. 월스트리트에서는 그보다 1년 전부터 아우성쳤건만 정권 말기에 들어간 백악관과 재무부는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다. 리먼사태가 터진 후에야 긴급 구제기금 7000억달러를 의회에 요청했고, 의회는 한심스럽게도 이를 거부했다. 주가가 사상 최악으로 폭락한 참변을 목격하고서야 긴급구제를 허락했다. 미국 정치는 선제적 진압에 실패했고, 시장의 사후 도발에도 패배했다.
연평도 폭격을 보며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몇 배로 대응 사격했더라면…' 하는 탄식이 쏟아진다. 선제공격은 못해도 초기 대응이 민첩했더라면 밑바닥 민심이 지금처럼 흉흉하지는 않을 것이다. 포탄이 쏟아지는 판에 합참으로, 국방부로, 청와대로 "쏠까요? 말까요?" 물으며 결재 서류를 돌리는 듯한 모습에 좌절감은 커지고 말았다.
현대전과 금융위기에서 신속함만큼 중요한 것이 대응 방식이다. 금융위기에는 갈수록 거칠고 난폭한 처방이 먹혀드는 추세다. 경제 전문가들은 '금융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말을 곧잘 쓴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꼬박꼬박 거치다가는 위기를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웃분 도장을 다 받고 원칙을 따지다 보면 실기(失機)하고 만다.
금융위기를 맞아 일본은행은 시중은행을 거치지 않고 우량기업에 직접 대출금을 대주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도 기업 어음을 직거래로 사주고, 금융회사들이 여유자금을 맡기면 이자까지 계산해주었다. 법(法)에도,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는 처방이다. 난폭하게나마 우선 행동에 옮기고 보는 게 금융계의 전쟁 방식이다.
연평도 해병부대에서는 교전규칙을 꼼꼼히 따져봤던 모양이다. 적의 포탄 숫자를 헤아려보고 "그럼 우리는 몇 발 쏠까"라며 계산기를 두들겨본 후에 반격하려는 심사였을까. 규정과 원칙을 더 따지는 뱅커들이 변칙 공격을 애용하는 시대에 생명을 걸고 싸우는 군인들이 왜 규칙을 따지고 '확전(擴戰) 말라'는 지시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싸맸던 것일까.
2년 전에는 온 나라가 외환위기 속에서 허둥댔다. 지금은 온 국민이 전쟁 패배의 불안 속에 빠졌다. 외환위기는 미국의 구제금융(SWAP협정) 덕에 한숨을 돌렸고, 요즘은 조지워싱턴호 덕에 숨통을 텄다. 이 정권에서 두 번씩이나 자체 방어력을 잃고 미국산(産) 구명보트에 얹혀가는 신세다.
전쟁이든 금융위기든 국민은 정치를 시험하고 지도자를 채점한다. 정치가 과연 '나'를 지켜줄지, 내 가족, 내 직장, 내 집을 지켜줄지 주시한다. 여기서 패배한 정권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미국부터 영국·아이슬란드·그리스까지 정권이 줄줄이 바뀌었다.
금융의 야만적인 얼굴조차 모르는 CEO(최고경영인) 출신에게 현대전의 본성까지 간파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지 모른다. 골드만삭스에 엄청난 이익을 남겼던 돈벌이 귀재(鬼才)도 금융의 폭력성에 두 손을 들었다.
국민이 정치와 지도자를 믿지 않으면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와 내 재산을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고 낙담하면 경제의 기본 바탕인 신뢰가 깨지고, 곧이어 불황이 스며들면서 금융위기까지 재발할 수 있다. 무기력한 상태가 지금처럼 계속되면 연평도 사태는 안보위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입력 2010.11.2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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