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리뷰] 일제下 최고 인기 잡지 '삼천리', 가벼웠기에 더 정치적이었다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국문학

    입력 : 2010.11.27 03:01

    식민지 근대의 뜨거운 만화경

    천정환·이경돈·손유경·박숙자 편저|성균관대 출판부
    503쪽|2만5000원

    1930년대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유독 사상범·정치범에 관한 기사가 많았다. 그것은 편집인이었던 김동환의 정치적 경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김동환은 장시(長詩) '국경의 밤'으로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조선일보·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약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런 김동환이 총독부 출입기자로 활동하다가 받은 '촌지'를 밑천으로 1929년 창간한 잡지가 '삼천리'였다.

    그런데 '삼천리'가 사상범·정치범을 다루는 방식은 '개벽' '조선지광' 등 특정 단체나 이념을 대변하는 잡지들과는 달랐다. 사상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 한용운·임원근·심훈 등 3명의 수감생활 체험을 소개한 기사 '재옥(在獄) 중 성욕 문제'(1931.3)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생물은 언제든지 주위 환경에 적응하게 생활 방식을 꾸며내는 것이므로 약 2~3개월 지내니 그제부터는 이 생물적 문제에 번뇌 아니 하였다고 고백할 용기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며칠에 한 번씩 수X을 하였던 것이다."

    제1차 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임원근은 엉뚱하게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며칠에 한 번씩 수음을 했다고 고백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남성 수감자의 아내들을 모아놓고 남편이 감옥에 갔을 때 아내가 수절(守節)해야 하는지를 묻는 기사(1930.11)도 있다. 이렇듯 '삼천리'는 호마다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문학사·언론사 연구자들이 '삼천리'를 철저히 무시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의 뜨거운 만화경'의 저자들은 1930년대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의 복합성과 모순을 보여주는 대중잡지로서 '삼천리'를 학문의 장으로 끌어올려 재해석한다. 정치범의 성욕 문제를 다룬 기사만 하더라도, "정치운동의 '정'자도 쓰지 못하게 된" 시대에 정치 문제를 다루는 일종의 '서사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천리'는 정치 문제를 그처럼 가볍게 다루었기 때문에 소위 '정론지'들이 정치적 사안에 대해 침묵했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정치적 사건과 인물들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각인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삼천리'가 진지한 정론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십거리만 가득 찬 통속잡지도 아니었다. 정치·군사·국제·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 기사가 게재되었고, 편집인 김동환의 방대한 인맥을 바탕으로 좌우를 망라한 다양한 지식인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삼천리'를 문화민족주의를 근저로 삼은 '정치적인' 잡지였다고 규정한다. 참정권이 없었던 식민지 조선인들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지만, '삼천리'는 '명인열전'(1929.11), '풍운 중의 거물들'(1931.11), '차대(次代)의 지도자 총관'(1932.3) 등 조선의 각 분야와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지상에 집중적으로 소개해 민족적 대표성을 획득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상의 '정치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삼천리'는 '친일파 김동환의 잡지'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중일전쟁 발발(1937) 이후 친일적 기사를 쏟아냈다. 가령 '조선인육군특별지원병령'(1938)이 공포된 이후에는 지원병 2000명 모집에 8만4000명이 지망하고 그 가운데 혈서(血書) 지원자도 200명이나 된다는 '지원병 지원 열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1940.5), '지원병 지망자 10만 돌파 기념 특집호'(1940.7)를 간행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삼천리'와 편집인 김동환에 '친일(親日)'이라는 낙인을 찍는 대신, 기사 내용을 엄밀히 분석해 친일의 맥락과 논리를 해명한다. 과거를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밑거름으로 보고자 한 것은 이 책이 지닌 미덕 중 하나다.

    '삼천리'는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검열, 잡지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 변덕스러운 대중의 취향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간행된 유일한 잡지다. 152권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그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정치적 맥락에 지나치게 매달려 '대중' 저널리즘으로서 '삼천리'가 지닌 발랄함이나 잡지 '경영자'로서 김동환의 면모 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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