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KBS 후원으로 11월 21일까지 개최하는 《고려불화대전(大展)-700년 만의 해후》가 뜨거운 관심 속에 열리고 있다. 일본·한국·미국·유럽에 있는 고려 불화 61점 등 총 108점의 불화와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이번 특별전의 기획자인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이 2년간의 전시 준비 과정을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

"이 그림은 절에서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폭염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성실히 조사하고 그림을 소중히 다루는 모습에 감복했습니다…. 빌려 드리겠습니다."

지난 2009년 여름 교토의 고찰(古刹) 교쿠린인(玉林院) 주지 스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려불화대전(大展)'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순간이었다.

일본 요주지(養壽寺) 소장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불화대전' 기획의 시작은 3년 전 일본 연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중 일본 전국 각지에서 문화재 관련 특별전이 열리는 것을 내심 부러워하던 나는 문득 고려 불화를 떠올렸다. 한국 문화예술의 최고봉으로 꼽히지만 학자들도 쉽사리 실물을 볼 수 없는 고려 불화.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불화 160점을 최대한 한자리에 모아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가지타니 도다이지(東大寺)박물관장에게 슬쩍 말을 꺼내봤다. "고려 불화 특별전을 해보고 싶은데 일본 쪽에서 쉽게 빌려주지 않겠죠?" 선생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라면 이제는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귀국하자마자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 개관 5주년 특별전으로 '고려불화대전'을 열자고 강력히 제안했다. 최광식 관장은 "가능하겠느냐"고 묻더니 "한 번 해보자"라고 흔쾌히 수락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준비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2년 동안 수십 차례 일본을 왕래하며 사찰을 찾아다녔다. 방문 의사를 밝히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작품 조사는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기다리면 연락드리겠다"는 말만 돌아왔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승낙을 받은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중 처음으로 대여 승낙을 받은 곳이 교쿠린인이었다.

일본 게간지(桂岩寺) 소장 고려불화‘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비단에 채색, 135.0×86.0㎝

요주지(養壽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조사하기 위해 그림이 기탁된 아이치(愛知)현 이와세(岩瀨)문고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도쿄에서 기차를 네 번 갈아타야 하는 시골이었는데 기차 시간을 잘못 체크하는 바람에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고 말았다. 긴장해서인지 한겨울인데도 땀이 흘렀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족자를 풀어 그림을 펼쳤다. 비단 화폭 속 자애로운 얼굴의 관음보살 앞에서 감탄이 새나왔다. 세밀한 금선(金線)이 선명히 남아 있었고, 붉은색·녹색·금색의 색감이 화려하면서도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조사를 끝냈더니 지켜보던 연구원이 "우리 문고에 고려 불화 한 점이 더 기탁돼 있다"고 했다. 인근 게간지(桂岩寺)의 '아미타팔대보살도'였다.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유물이었다. 요주지 스님은 게간지 주지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연구원이 작품을 아주 소중히 다루니 당신도 빌려주라"고 설득해줬다.

위기도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직후 일본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 작품 반환은 고사하고 보험금도 못 받는다"며 소장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교섭한 곳 중 80%의 출품 동의를 얻어냈고, 역대 최대의 고려 불화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전시는 성공리에 개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연 이래 최고 전시'라는 평과 함께 "평생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문화계 인사들은 물론 정치·경제인들까지 전시장을 찾는 등 선조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안타까운 점도 많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려 불화이지만 연구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해서 아직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일부는 보존 상태가 불량해 보존 처리가 시급하지만 작은 사찰들은 수리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방치되어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고려불화기금'을 조성해 우리가 연구 및 보존에 앞장서서 자랑스러운 선조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