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어느 밤 파키스탄 북서부 와지리스탄의 산악지대. 반군 무리가 어둠을 틈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전달할 무기를 트럭에 싣고 이동 중이다. 소리 없이 머리 위로 미군 무인폭격기 MQ-1프레데터가 나타났다. 반군은 피해보려 하지만 이미 골짜기 전체에 폭격이 시작됐다. 공격을 지휘하는 것은 아프간 주둔 미군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 미국 버지니아주 랭리의 CIA(중앙정보국) 본부다. CIA는 와지리스탄 지형을 그대로 본뜬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무인정찰기의 항로와 요격 정확도를 높였다. 9월에만 이런 공격이 21차례. 먼지 날리는 야전 텐트에서 첩보를 분석해 포격 계획을 짜던 전장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게임에서나 본듯한 '워(war) 시뮬레이션'이 실제 전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분석은 가라! 시뮬레이션이 왔다

시뮬레이션의 시대가 훌쩍 다가왔다. 시뮬레이션은 '실제와 비슷한 모형을 만들고 모의실험을 해보는 작업'을 말한다. 조선일보 '뉴 밀레니엄 리포트' 자문위원들은 지난 10년의 주요 변화로 "분석의 시대가 저물고 시뮬레이션의 시대가 온 것"을 꼽았다. 과학칼럼니스트 김주환 박사는 "연구실에 들어 앉아 종이에 공식을 그려가며 분석하고 이론을 집대성하던 이른바 '분석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초고속 연산 프로세서를 갖춘 수퍼컴퓨터의 발전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중국이 공개한 세계 최고 속도의 수퍼컴퓨터는 이론적으로 1초에 4000조(兆)번의 연산이 가능하다. 기본 명제 몇 가지만 입력하면 시뮬레이션으로 수억, 수십억개의 가능성들을 단시간에 검토하고 트렌드를 뽑아낸다.

그래픽=김현국 기자 kal9080@chosun.com

시뮬레이션은 이미 군사·경제·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블룸버그통신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추가 양적 완화 결정을 내리는 데 시뮬레이션의 역할이 컸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연준 고문단은 직접 시뮬레이션을 돌려 양적 완화의 여파를 가늠했다. 양적 완화 조치로 내년 상반기 달러가 10% 하락하며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이상적인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이 같은 보고가 버냉키 의장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호주중앙은행도 멜버른대 시뮬레이션연구소에 의뢰해 돈의 흐름을 파악하고 경제정책을 짜고 있다. 과거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매달려 미시경제를 분석하며 거시적 현상을 예측하던 모습은 줄어들고 있다.

시뮬레이션이 대세지만 우려도 있어

시뮬레이션은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민·군 시뮬레이션 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이지스 테크놀로지그룹의 빌 웨이트 사장은 "초창기에는 군 관련 일거리가 많았지만 최근엔 민간 사업가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에만 시뮬레이션 관련 산업 종사자가 40만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조지아공대, 애리조나주립대 등 대학들은 시뮬레이션 모델링 학과를 적극 양성하고 있다. 점차 대학에 시뮬레이션 관련 학과 개설이 늘어날 것으로 NYT는 전망했다. 미군에 무인정찰기를 공급하는 이스라엘 군수산업은 불황을 모르고, 국제적 기업들 역시 소비자 패턴 분석을 위해 앞다퉈 시뮬레이션을 가동하고 있다. 일본 화장품회사 시세이도는 '메이크업 시뮬레이터'란 기술을 선보였다. 컴퓨터 웹캠에 얼굴을 비춰 온갖 종류의 화장을 시뮬레이션 해보고 꼭 맞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시대에 대한 우려도 없지는 않다.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분석'은 시뮬레이션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검증과 오류와 예외에 부딪히며 꼭 맞는 공식을 도출하기 위해 반복해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에 몰두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문위원들은 "학자들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분자의 움직임을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열(熱)역학의 경우 수퍼컴퓨터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분자 간 밀고 당기는 힘의 원리만 입력해주면 된다. 그 어떤 분석이나 실험보다 정확한 예측과 이론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나온다.

학자들은 이제 분석이 아니라 수퍼컴퓨팅을 잘해야 인정받는 시대가 됐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더 적절한 시뮬레이션을 먼저 하는 학자가 이론을 정립한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학의 기본 법칙만으로도 시뮬레이션이 가능해 대학·대학원 과정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주환 박사는 "기계공학·우주공학을 막론하고 연구소의 전산소화(化)가 이뤄지고 있다"며 "기술은 심화하지만 인간은 단순해지는 현상이 시뮬레이션 시대의 맹점"이라고 말했다.

◆자문위원 명단

[국내]
고영선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김현욱 KDI 거시경제연구부장
박래정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원광연
카이스트 CT(Culture Technology) 대학원 교수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윤영준
대홍기획 소비자전략연구소 팀장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해외]

로저 켐프 켐프 컨설팅 대표·'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달성하는 법' 저자
말콤 쿡 로위연구소(호주) 동아시아 담당 연구원
배리 민킨
민킨연구소 대표
쉬밍치
(徐明棋) 상하이사회과학원 세계경제硏 부소장
스티브 쾨니그 전미가전협회(CEA) 산업연구소장
아널드 브라운 미래학자·'퓨처 싱크' 저자
옌쉐통
(閻學通) 칭화대 국제관계학원 원장
오구라 기조
(小倉紀 ) 교토대 문화인류학 교수
윌리엄 해럴 조지워싱턴대 정보시스템경영학과 교수
제프리 고드비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넥스트컨설팅 대표
조지프 홍콩시티대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