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인생] 소설가 한승원의 장흥

    입력 : 2010.10.13 23:11 | 수정 : 2010.10.14 10:44

    장흥 바다는 마르지 않는 내 문학의 샘
    탐욕에 찬 서울 삶 접고 장흥 바닷가 돌아온 지 14년
    괴롭던 병 가라앉고 고통스럽던 소설 쓰기 즐거워졌다
    이젠 내가 고향에 보답할 차례

    그 집 마당엔 고운 여인네의 향기가 떠다녔다. 노란 꽃을 자잘하게 매단 만리향이 향긋한 내음을 뿌리며 '여기는 남녘 땅'이라고 새삼 알렸다. 언덕 발치로 풀린 옷고름처럼 해안도로가 흘러간다. 그 너머 득량도와 소록도가 떠 있다. 장흥 안양면 율산마을 야트막한 산자락, 한승원의 집필실 '해산토굴'에선 득량만 바다가 한눈에 든다.

    해산(海山) 한승원은 스님들이 수행처를 낮춰 이르는 '토굴'을 당호(堂號)로 붙였다. 거기 파묻혀 도 닦고 글 쓰기에 몰두하겠다는 뜻이다. 고향 장흥으로 돌아온 지 14년, '흑산도 하늘길'부터 '초의' '원효' '추사' '다산' '피플붓다'까지 장편만 열두 편을 써냈다. 일흔한 살 작가는 "서울 살 땐 고통이었던 소설 쓰기가 즐거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장흥 회진면에서 태어났다. 먼저 간 이청준과 동향(同鄕) 동갑내기다. 지금은 연륙교가 놓여 뭍이 된 덕도에서 아버지는 열 마지기 농사와 김 양식을 했다. 마을에선 부자 소리를 들었지만 읍내 장흥중으로 진학하고 보니 가난한 쪽에 들었다.

    그는 한 주 걸러 한 번씩 80리 길을 걸어 고향집에서 자취방으로 쌀 닷 되, 보리 닷 되를 지고 왔다. 쌀을 보리로 바꿔 팔아 남긴 돈으로 책을 사고 하루 두 끼 거친 보리밥을 먹었다.

    그는 장흥고 다니면서 소설 읽기에 빠졌다. 문예반에서 쓴 장편(掌篇)을 보더니 지도 선생님이 "참 잘 썼다"고 칭찬한 게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졸업 후 3년 논 농사, 김 농사를 지었다.

    쟁기질 하고, 새끼 꼬아 김 발 엮고, 김 말뚝을 박았다. 대학 안 가도 시인·소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긋났다. 번번이 문학지 공모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 겪어낸 갯바닥 삶은 한승원 문학의 모태(母胎)가 됐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는 아버지 고집을 꺾고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갔다. 66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등단 작품 '목선(木船)'부터가 고향 덕도의 갯마을 사람들 이야기다. 그의 문학 언어에선 늘 비릿한 바다 냄새와 싱그러운 흙 냄새가 배 나온다.

    한승원은 장흥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광양중, 광주 동신중 교단에 섰다. 그러면서 터울이 스무 살까지 지는 동생 여섯을 뒷바라지했다. 교사 봉급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소설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좋은 평판이 나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고 원고료와 인세가 월급을 웃돌았다.

    그는 80년 서울로 올라와 전업작가로 살았다. 영화로도 성공한 '아제아제바라아제'를 비롯해 베스트셀러를 연이어 냈다. 순수문학을 지키면서도 동생들을 대학까지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냈다.

    그러던 96년 쉰일곱에 그는 낙향을 결심했다. 부정맥과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때였다. 동생들도 다 키웠기에 이젠 나를 위해 소설을 써야겠다고 맘먹었다. 모두가 "문학시장 서울을 두고 왜 내려가느냐"고 말렸다.

    한승원은 장흥에 집을 짓고 방대한 고전과 역사서를 읽어댔다. 사서칠경, 불경, 천주교 서적을 독파하고 글씨와 차(茶)도 공부했다. 그러면서 정약전, 초의선사, 김정희, 원효대사, 정약용이 차례대로 그의 펜 끝에서 되살아났다.

    부정맥도 가라앉았다. 그는 육고기를 끊고 주로 생선을 먹는다. 집 뒤 600평 차밭을 가꾸고 풀을 베고 차를 따고 덖고 우려내 마시는 모든 것이 수행이다. 그는 몸이 절망적으로 아팠을 땐 예순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어느덧 10여년을 덤으로 산 셈이다. "왜 그땐 그리 앓았을까. 되돌아보면 그건 탐욕이었다"고 했다. 고향 바다와 자연이 주는 유쾌함이 소설 쓰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한승원이 고향에 빚 갚을 생각으로 3년을 구상해 쓴 장편이 '피플붓다'다. 장흥의 진산 억불산(億佛山)을 소재로 삼았다. 억은 만민을 뜻하고 억불은 만민을 구제하는 부처, 피플붓다를 의미한다. 바로 그 미륵부처가 있는 땅이 장흥이라고 했다.

    장흥엔 천관산,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까지 명산이 넷이나 된다. 동학군 3만이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맞섰던 땅이다. 그는 "장흥 사람들 몸엔 힘있는 것에 대한 저항의 피가 흐른다. 생명력도 강하다"고 했다. "그 피가 내 작품에도 흐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당 한쪽에 둔 상석(床石)을 가리키며 "여기가 내 무덤"이라고 했다. 유골 뿌려 달라고 소설가인 아들 동림과 딸 강에게 이야기해놓았다. 그는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고, 글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장흥에 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로 앞 여닫이해변으로 나갔다. 한쪽으로만 열리는 여닫이문처럼 육지 쪽 물만 내보내는 수문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관광공사가 '가장 깨끗한 개펄이 숨 쉬는 아름다운 바닷가'로 꼽은 해변길 600m에 '한승원산책로'가 나 있다. 장흥군이 길 따라 비(碑)로 세운 한승원의 시 30편 중에 '나 그냥 그렇게 산다'에 눈길이 간다.

    '구름이 물었다 요즘 무얼 하고 사느냐고/ 내가 말했다 미역 냄새 맡으며 모래알하고/ 마주앉아 짐짓 그의 시간에 대하여 묻고/ 갈매기하고 물떼새하고 갯방풍하고 갯잔디하고/ 통보리사초 나문재하고 더불어/ …/ 나 그냥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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