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독립문은 제자리 찾아줄 수 없나

    입력 : 2010.10.11 23:26

    김태익 논설위원

    서울시가 시내 곳곳의 고가차도를 철거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청계고가차도와 미아리, 원남동, 한강대교 북단, 혜화동, 광희동의 고가차도가 지난 몇 년 사이 차례로 헐렸다. 최근에는 퇴계로 회현 고가차도를 헐어 한국은행 쪽에서 바라보는 남산이 시원해졌다.

    하나의 고가차도를 헐 때마다 안 그래도 막히는 서울 시내 교통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통정체는 생각했던 만큼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들은 도시 곳곳의 흉물스러운 시멘트 덩어리를 걷어내는 데서 오는 심리적·시각적 해방감에 비할 때 다소 늘어난 교통정체 정도는 참을 만하다고 보는 것 같다.

    청계고가차도를 짓던 1970년 무렵 서울의 자동차는 7만대였다. 그런데도 고가차도를 짓는다, 육교를 만든다 법석을 떨었다. 속도와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시대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금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은 298만대다. 자동차는 수십 배 늘었는데 많은 시민은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쪽에 손을 들고 있다.

    이처럼 달라진 시대 분위기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것이 고가차도 건설로 인해 제자리에서 쫓겨난 독립문이다. 사적(史蹟) 32호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를 건설하고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잇는 현저 고가차도를 만들 때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그 결과 의주로 한복판에 당당히 서 있어야 할 독립문은 서대문 쪽에서 보나, 무악재 쪽에서 보나 한쪽에 숨듯이 비켜서 있다. 고가차도로 인해 주변 경관은 망가졌다. 그러나 현저 고가차도는 서울시가 추진 중인 고가차도 철거 대상에서 빠져 있다.

    독립문은 특히 원래 서 있던 위치가 생명과 같은 문이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使臣)들을 맞으며 머리 조아리던 영은문(迎恩門)을 헌 자리에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의 상징으로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은문이란 이름은 중국을 '은총(恩寵)'을 베푸는 상전으로 받들라는 뜻으로 중국 사신이 지었다. 독립문 건립 주역 서재필은 "나는 고국에 돌아와 무엇보다 이 더러운 문, 부끄러운 문부터 없애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조선시대 국왕과 세자는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즉위할 수 있었다. 구한말 스물여섯 나이로 서울에 왔던 원세개(袁世凱)는 '원대인'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불리며 마치 총독처럼 조선 조정을 휘저었다.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 우리 5000년 역사상 얼마나 혁명적인 일이었는지 깨닫고 고가차도 건설을 이유로 독립문을 옮기는 것 같은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6월 사설에서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길이 잊지 않게 하라"고 외쳤다.

    서재필이 오늘날 독립문 머리 위를 짓누르듯 달리는 고가차도를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서울시가 지금은 형체도 없는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겠다고 하면서 독립문 원상회복은 계획조차 잡지 않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10년, 20년 걸리더라도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주겠다는 의지로 방법을 연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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